김기열(본지 논설위원·문학박사 김기열)

● 증자헌대부 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조세발 처 증정부인 여흥 민씨 열녀정려지문(贈資憲大夫 戶曹判書 兼 知義禁府事 五衛都摠府 都摠管 趙世發 妻 贈貞夫人 驪興 閔氏 烈女旌閭之門) : 충숙공의 손자 조세발(世發)의 부인인, 여흥 민씨는 효종 9년(1652)생으로 숙종 8년(1682)에 31세로 열절(烈節 : 義라고 믿는 바를 굳게 지킴)하였다.

민씨는 병자호란 당시 13명이나 되는 일가족과 함께 자결한 충신 민성(閔?)의 증손녀로서 충숙공의 손자인 판서공 조세발의 아내가 되었다.

그의 남편인 세발이 5형제 중 세째로서 부친 조유(猷)의 상중(喪中)에 풍수학자의 말이 선친의 묘를 이곳에 쓰면 온 후손이 나라의 동량급(棟梁級)의 충의사가 될 인재가 많이 배출할 것이나, 다만 중자(仲子)는 단명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형제들이 꺼려서 포기하려고 하였으나, 당사자인 세발(호조판서에 추증됨으로써 판서공이라고 함)이 나서 나 하나 희생으로 어버이에 효를 다하게 되고 후손들이 입신양명한다면 그보다 더 이상 홍복이 없을 것이라고 하여 그 자리에 묘를 쓰게 되었다.

옛글 중 판서공과 여흥 민씨 부부가 이룩한 효열담(孝烈談)을 요약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민씨는 지극한 효도로 부모를 섬겼으며 14세에 부친상을 당함에 어른같이 슬퍼함으로 참아 볼 수 없었으며, 어머니상을 당하여도 예절에 맞추어 집례(執禮)하고 병이 나도 생강과 계피를 먹지 아니하고 제복을 벗지 아니하여 눈물에 젖어 썩었으며 몸이 쇠약해져 병이 났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보고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부친 통어사공(조유)의 장지를 정할 때 중자(仲子)가 단명할 것이라는 풍수의 말에 중자인 공이 풍수를 믿을 수 없고 또한 어버이를 편히 모시면 비록 죽은들 무슨 한이 있으리요 하였다.

그리하여 그해 11월 12일 탈상 전에 별세하니, 이는 상중에 시묘살이 등을 지극히 함으로써 너무 쇠약해져서 명을 해친 것이어서 그의 효심에 세인이 감복하였다.

 민씨는 남편의 상을 당하여서는 옷을 갈아입지 않고 세수도 않고 머리도 빗지 않고 다만 손이나 씻고 벼룩이 물어도 돌아보지 아니하다가 대상날에 울며 동서에게 “이제 가히 내 뜻을 결정하였다.” 하고 10일 만에 죽으니, 임술 11월 22일이었다. 김포시내 간좌원에 합장하였다.

이상과 같이 충숙공의 독자이며 무의공의 증조인 조유(猷) 역시 인조 22년 무과에 급제한 후 영흥부사, 전라우수사, 경기수사, 통어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무의공의 조부 세발(世發)은 아들 경(儆)이 귀히 됨으로써 호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조경(儆)은 무의공 조심태 장군의 부친으로 전라병사, 곡산부사, 금군별장, 통제사, 평안도병사 등을 역임한 통어사공(統禦使公)이며, 영조때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집안에 큰 쌀독 하나 없는 등 청렴하였으므로 사후에 청백리로 뽑혔으며,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렇듯 무의공의 집안은 조선 후기 무반벌족(武班閥族)의 명문가였다.

조경은 통제사로 있을 때, 한산도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제승당(制勝堂)의 유허비문을 찬(撰)하기도 한 문무를 겸한 장군이었다. 이같은 가문은 조심태 장군이 문무를 겸한 당대 최고의 무장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 증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시 무의공 조심태 처 증 정경부인 죽산 안씨 열녀정려지문(贈 崇政大夫 議政府 左贊成 諡 武毅公 趙心泰 妻 贈 貞敬夫人 竹山 安氏 烈女旌閭之門 : 정경부인 죽산 안씨는 영조 12년(1736)생으로 정조 23년(1799)에 63세로 열절(烈節)하였다. 안씨는 병사(兵使) 안윤복(安允福)의 딸로서 남편 무의공이 정조와 함께 한 25년여의 세월을 뒤로 하고 1799년(정조 23)에 전국을 강타한 괴질로 인하여 역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조장군이 수원(水原) 임지에서 득병하여 중환이 들었음을 알고 자신의 명을 남편에게 옮겨서 그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기를 소원하며 그를 간호하다가 그가 더 이상 소생할 수 없음을 알고 곡기를 끊어 먼저 자진하였고, 장군은 부인 죽산 안씨가 별세한 10일 후 아내를 따라 운명하였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내외가 충, 효, 열을 모두 갖춘 가문이라고 여겨 조야(朝野)가 모두 감동하였다.

무의공 양위분의 묘소는 수원 근교의 어탄리에 초장(初葬)하고 순조(純祖) 등극초에 정문이 하사되어 종가의 문 앞에 홍살문과 함께 설치되었으나, 종가의 퇴화로 훼손되어 현판만 남아, 무의공의 조부모 묘소 앞에 1960년경 조모인 여흥 민씨와 손부(孫婦)인 죽산 안씨의 현판을 간소한 단간 각을 종중에서 지어 현재까지 보존하고 있다.

또한 무의공의 묘소도 수원 근교에서 현 위치인 김포시 감정동 나진교(羅津橋) 산389번지의 선영(先塋)으로 1915년경에 이장하였다.

위와 같은 보기 드문 나라에 대한 충의와 어버이에 대한 효성과 열부(烈婦)의 열절(烈節)로 가문의 3대가 정려문을 받은 예는 흔치 않는 일로 후세에 귀감이 되었다. 우리 김포시는 나진교 인근 야산에 세워져 있는 정려각 일대를 도 또는 시 문화재로 지정하여 그 앞에 홍살문을 복원하는 등 다음과 같은 조치를 하여 교육 및 관광자원화할 것을 건의하는 바이다.

○건의 사항 ①무의공의 업적과 가문에 관한 책자 발간 및 신도비 수립 ②정려문을 받은 세 분 묘소 및 사당과 사적비 건립 및 문화재 지정 ③정려문을 받은 세 분의 정려각과 홍살문의 복원 및 문화재 지정 ⑤도로에 사적 안내판을 세움

김포시는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의 유적을 찾아 문화재로 지정하고, 그 업적을 기리는 일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우리 김포가 역사문화관광 도시가 되게 해야 할 것이다.

수원시에서 무의공의 영정을 제작하고 동상도 세울 것이라고 한다. 신도비 건립과 묘역 보수 등에 수원시의 협조도 구하여 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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