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 勝 世

전국 방방곡곡에 열풍이 가득하다. ‘월드컵 열풍’과 ‘대선후보 국민경선 열풍’이 그것들인데, 앞의 것은 건국이래 처음 치르는 나라의 크나큰 경사라는 대의에서, 그리고 뒤의 것은 건국이래로 처음 시도된 정치적 대변혁의 상징성에서, 가히 그 열혈의 이름값들을 위풍재고도 남는다. 그 뿐인가. 그 와중에 이른바 풀뿌리 민주주의로 거론되는 ‘지자체선거 열풍’마저 섞여 들었다.
어차피 불기 시작한 바람은 부는대로 지나간다. “할 수 있다, 16강진입! 내친 김에 8강진출!”하는 따위의 소망은 순실(淳實)해서 아름답고, 설령 이런 소망이 못 이뤄졌다 해도 “그래도 잘 싸웠어!”하는 질박한 실망은 처연해서 값지다. ‘월드컵 열풍’쯤은 그래서 께름칙하지 않다. 아니, 창조사회의 건실한 활성과 신선도 유지를 위해 ‘불 수록 좋은 열풍’이다.
그런데 불지 않아야 할 열풍이 불고 있다. 바로 선거철에 즈음한 ‘정치판의 열풍’인 바, 이 바람은 지나 갈 줄도 모르고 풍속(風速)도 잃은 채, 지체와 정체를 반복하며 오랜 세월동안 대한민국을 덮고 있다. 야살스러운 언변과 술수의 사심(邪心)으로 국민을 능갈치는, 이 패악에 가까운 타성(惰性)의 실질은 어떤 것인가.
이제야 우리나라의 정치판도 정정백백한 진취의 새로운 싹이 돋는구나 하는 감격이 앞서 ‘대선후보 국민경선’에다 열정의 기대를 걸었다. 보나마나 들으나마나, 이제 경선의 결과가 빤한 오늘에 이르러, 필자의 관전감(?)은 실의의 매운 허탈함이라기보다 참담한 비애에 가깝다. 지지후보의 낙선이라던가 도중하차 따위의 상정적 비천성에 근거한 비통함이 아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한결같이(한 두 명의 예외는 있겠으나) 자기용도(自己用途)의 ‘주도적 사고(主導的思考)’만 목젖에 피멍들도록 외쳐대는가 말이다. 우리나라의 정치사는 패덕하고, 혹은 무능한, 영도자들의 완강한 ‘주도적 사고’가 세월의 고비 고비를 이어 올 연동적(連動的) 과정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랑케학파의 태두인 독일의 역사학자 ‘렐프로드 폰 랑케’는 이렇게 말한다.
“결국 인류의 소원은 부강한 조국과 유기적 질서의 사회건설이다. 지식인들의 주도적 사고가 사회의 유기적 활성에 공헌함은 사실이다. 그러나 주도적 사고의 지식은 보완적기능(補完的機能)의 지식에 비해 매우 위험한 우발적 모험성을 갖게 돼있다. 왜 그런가. 부강한 나라와 유기적 사회건설은 지식의 보완적 기능으로 가능하지만, 그 나라와 그 사회의 철저한 파괴는 자기용도적 지식의 주도적 사고로 수행되기 때문이다.”
‘렐프로드 폰 랑케’의 탁견이 지니는 의미의 심각성은 너무 절절하다 못해 사뭇 엄절하기까지하다. 어쩌면 이렇게도 우리나라의 정치현실에 딱 들어맞는 훈교일 수 있을까.
‘주도적 사고’가 ‘선언’이요, ‘제언’에 가깝다면 ‘보완적 기능’은 ‘실천’과 ‘소명’을 속살로 한다. ‘주도적 사고’의 허갈을 일삼는 자는 문자 그대로 허명무실의 무기력한 딴 세상이나 물색해서 조용히(?) 살 일이니, 원컨대 정치마당 쪽은 아예 넘보지도 말아달라 손 모아 빌고싶다. 어찌하여 이런 만담이 가능한가. 그 까닭인즉 만에 하나― 이런 자질미달의 사람이 횡재를 만나, 정치판을 휘젓는다면, 얼마나 많은 순량한 국민들이 사고의 도식성과 이기적 생존의 형식률에 함몰되는 ‘문화적 유토피즘’의 중증환자로 전락할 것인가, 하는 우려 때문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명색이 대선후보들의 ‘주도적 사고’ 밀어붙이기가 이럴진대 ‘풀뿌리 민주마당’이라고 다를 게 없다는 생각 하나 ―.
뜨거운 선거열풍 속에서 들숨날숨 번가르기도 버겁다. 제발 김포땅에서라도 제대로 뽑자.
<시인?소설가.본지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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