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 달린다. 눈길이 달린다. 마음이 달린다.
서을을 떠나 늘 멀리 있는 고향을 찾아 달린다.
김포사람들의 탯줄을 묻은 팽개다리(평교)를 지나 철종이 쉬어갔다는 천둥고개를 넘지않고, 큰 도로를 빠져 나와 제방도로 위로 올라탄다. 영사정이 있는 고촌의 산들이 봄 산의 내음을 한강 위로 뿜어댄다.
철새들이 떼지어 장마 때 떠내려가던 나무둥치들이 뭉쳐진 쬐그만 섬들 같다.

김포를 찾아서

논들은 갈아 엎어져 묵은 겨울옷을 벗어 던진 채 알몸으로 새 햇살을 따사하게 쪼이고 있다.
그래도 가끔은 가는 빗줄기를 기다리며. 예전 같으면 쟁깃날의 예쁜 자국이 햇살에 번쩍거릴텐데.
기계의 어설픈 자국이 무디게 남아 마음을 슬프게 한다.
다시 도로를 버리고 예전의 논길로 들어서 장굴로 빠진다. 낭만과 사연을 지닌 듯한 이 명칭을 왜 장곡이라는 멋없고 딱딱하게 개명했을까? 배, 사과, 딸기의 달디단 향기를 담아내기엔 너무 시멘트 냄새가 진동한다.
풍무리를 지나 사우리로 접어든다. 시멘트를 짓이겨 콘크리트로 만든 터널같은 지하도가 시내까지 차들을 급하게 빨아들인다.
이름그대로 강모래가 반짝거리고, 소나무들이 싱싱하게 질긴 녹색을 띄던 모래턱 인데. 북성산에는 어처구니없게 못생긴 시청 건물이 地氣와 人氣를 누르려고 폼을 잡고 있다.
원래는 홍두평을 끌어 안으며, 여우재 고개 넘어 아득하게 먼 검단을 지나 오류도의 갯벌로 가고, 또 선주지를 거쳐 계양을 지나 복숭아꽃이 폭죽처럼 날리는 소사로 가는, 그 모든 길들을 지키는 장승이었다.
그래서 예전에는 미사일 기지 대신 봉화대가 있어 김포의 생활을 바깥에 알려주곤 했다.

아름다운 고향

아, 그러고 보면 김포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장마당과 차부가 있는 번다한 읍내에서 강가로 조금만 걸음을 옮기면 들판이 펼쳐지고 맑고 차거운 강물이 흘렀다.
샛강에 물이 빠질 때면 벗고 들어가 진흙을 묻히면서 피래미와 붕어들을 양동이로 퍼담아, 솥을 걸고 지푸라기로 불을 지펴 밀가루 반죽과 잡채를 섞어가며 벌겋게 끓여 먹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그 유명한 홍두평 너른 벌판에는 늘 강바람에 실려 벼바람이 물결쳤고, 그 풀빛 물결 속을 자맥질하면서 새우처럼 파다닥 튀는 메뚜기들을 잡아 댓병짜리 막소주병에 채워오곤 했다. 바시닥거리는 참새 떼들 사이로 갈매기들이 너울거리고, 황새들이 구름 밭 같은 몸뚱이에 길고 가느다란 다리로 서서 오고가는 사람들에 눈길을 주면서 사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젠 시내의 곳곳에는 흉물스런 아파트들이 정말 웃기게, 제자리도 아닌 여기저기에서 뻗치기하고 있다.
사람들은 왠지 허둥거리는 몸짓이나 냉랭한 표정을 짓고. 서있는 듯 앉아있는 듯 어쩡정하기만 하다.
왜 이리 모든게 부자연스럽기만 한지 바라보기에도 난감하다. 거기다가 이젠 걸포리의 남은 들판 마저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개발한다고 발표를 하던데.
'된객이' '병막' '구둔물' '옹주물' '독잣굴' '여우재고개' ' 팽개다리' '샘재'. 그 신비롭고 아름다운 이름들이 그 기막한 사연들과 함께 이젠 아예 없어져 버렸다니. 그나마 흔적조차 알지도 못하니 역사에서도 버림받을 처지에 놓여있다.
김포에서 잠만 자고, 서울로 출근하는 사람들은 김포가 아름다운 터였던 줄은 알지 못한다.
아름다움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아름답지 못한 곳에서 어떻게 행복하게 살아갈 수 가 있을까?
아름다움을 잃은 세상에서는 아름다움을 그리워하는 일만도 아름다운데. 이제라도 김포의 그 옛날 아름다움을 되살려낸다면 얼마나 좋을까?
<동국대 역사학자·시인·본지편집위원·북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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