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호수의 물처럼 많이 쌓이는 동네김포를 동서로 나누면 서쪽은 염하, 동쪽은 폭이 넓은 한강이 흐르고 있다. 남북으로 나누면 북쪽은 벌판에 야산이 군데군데 보였지만 남쪽은 대부분 수로가 있는 드넓은 벌판이다. 김포 반도의 남쪽 끝에 자리잡은 고촌읍 전호리는 기름진 논밭이 있는 벌판이며 아라뱃길과 한강이 마주 닿는 곳이니 김포의 특색을 모두 갖춘 곳이다. 예부터 서해에서 밀물을 타고 조강을 거쳐 마포나루를 가는 가운데 전호리 포구가 있었고 부평의 젖줄인 굴포천을 따라 인천과 연결되고 있으니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다. 전호리는 예전에는
김포는 도농 복합도시로 현재 인구 70만 명을 앞두고 있다. 김포 태생으로 외지로 나갔다가 늘그막에 다시 귀향하는 이를 포함해 토박이는 7, 8만 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전 농협 이사인 이만의씨는 효령대군 16대손으로 풍무동에서 태어나 김포에서만 살면서 벼 다수확으로 대통령상을 받아 김포 농민의 전설을 써내려 간 분이다. 그는 여섯 살 때 마흔두 살 나이의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6.25 동족상잔이 끝난 해 설날 며칠 전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열한 마지기의 논과 삼백 평의 밭이 유일한 생명줄이라 어머니와 누님들은 논밭으로 나가 일
2024년 대한민국은 초저출산 초고령화 사회다. 임산부의 자궁에서 빠져나와 ‘앙’ 하고 우는 아이는 없고 벌써 무덤으로 들어가거나 한 줌의 재로 변해야 할 노인은 지하철 공짜로 타면서 스마트폰 황홀경에 빠진 세상이 왔다는 것이다. 이들 잉여인간은 무료급식소를 찾아다니며 점심 한 끼 때우려 한다. 불쌍한 노인에 비아냥거리는 나도 7학년이니 탓하지 말기 바란다. 어려운 세상을 만나 나이 먹은 이들끼리 서로 위로하고 위로받자는 뜻에서 이 글을 쓰는 것이다. 예순이 넘은 노인은 자식들 교육에 뼈 빠지게 번 돈을 몰빵 하는데 애들 학교 졸업
경기도 지사가 행정 편의를 위해 경기도를 남북으로 나누겠다고 하면서 불거진 김포의 서울편입 문제가 전국 이슈가 되었다. 한강물은 두 지역으로 나뉘었지만,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실제로는 길이고 다리요 라이벌이었다. 영어 Rival(라이벌)은 강을 뜻하는 river에서 나온 단어다. 라이벌은 적이 아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며 경쟁을 통해 상대를 인정하고 발전하는 관계를 말한다. 민초들과 함께 한 기인김포를 통한 원활한 운송공급으로 서울은 골고루 물자가 분배되었다. 쌀은 물론이고 생활필수품이 조
인간의 본성은 폭력이다. 인류 역사는 이 잔인한 본성 위에 만들어졌다. 초기 인류들은 작은 부딪힘에도 충동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기 일쑤였다. 동굴에 남은 원시인의 유해를 보면 이십대 초반의 나이에 두개골이 함몰되어 있다. 이들의 난폭함은 중국 고대사 기록에도 곳곳에 남겨져 있다. 인간이 개별 인간에서 사회적 인간으로 바뀌면서 지력이 높아지고 폭력이 배제된 평화를 갈구했다. 이러한 바탕에서 종교가 탄생했다. 거의 같은 시대에 석가모니와 공자, 뒤이어 예수가 등장해 경쟁적인 폭력 대신 사랑과 평화의 가치를 전파했다. 이렇게 해서 폭력은
김포가 지금은 도농복합도시로 수도권 도시 중에 발전이 더딘 듯 보이지만 6. 25 이전에는 매우 부유한 동네였다. 김포평야 하면 주식인 쌀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수확량이 많았다. 게다가 조강포서 하역한 물품을 상인들이 서울로 운반했기에 북적이는 길을 ‘조강거리’라 이름 지었다. 그러면 왜 서해로 들어온 배가 곧장 마포나 용산으로 가지 못했을까? 한강물 타고 곧장 가면 물류비용이 엄청나게 절감되었을 것인데 말이다. 그것은 시암리 앞의 암초 때문이었다. 좁은 강폭이라 큰 배는 지나가다 좌초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조강포에서 하역해야 했
김포는 염하강, 조강, 한강의 물길로 싸여 있는 반도로 서해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수운교통의 길목이다. 경기도 최대 곡창지대로 서울, 인천, 강화, 부천, 고양, 파주 등 크고 작은 도시와 인접하고 있다. 예부터 김포반도는 강화도와 함께 국방요충지로 외적이 침입했을 때 즉각 저항하는 DNA가 있는 곳이다. 구한말 병인양요(1866년), 신미양요(1871년), 운양호 사건(1876년)을 겪고 1907년 정미(丁未)해에 봉기한 정미의병의 중심지였다. 역사적으로 김포를 중심으로 수도권 일대에서 일어난 의병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김포 북부 통진에는 통진향교가 있는데 유학을 가르치던 조선시대 학교이다. 오늘로 치면 서당은 초등학교고 향교는 중학교라 말할 수 있다. 그러면 향교는 지금의 중학교와 무엇이 다를까, 무엇을 배웠는지 말하기 전에 그들이 배우는 유학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유교는 우리와 같은 동이족인 공자가 정립한 사상이다. 유학은 유교를 가르치는 학문이다. 유교는 제례에서 종교적인 면이 있지만, 그보다는 높은 수준의 윤리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유교가 이 땅에 들어온 것은 신라시대로 고려 때까지 이어왔으나 불교에 눌려있었다. 조선이 건국되자 성
이십여 년 전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 때문에 세상이 떠들썩했다. 오랫동안 우리의 정신문화요, 생활윤리였던 유교를 정면으로 공격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전에도 유교의 수직 문화와 제례 때문에 사회적 갈등이 있었으나 이내 묻혀 버리곤 했다. 식자들은 우리 문화는 유교와 무속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잠재의식은 무속이요, 의식세계는 유교이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백 년을 훌쩍 넘었고 교인이 천만이라고 하지만 우리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안착한 유교 유교의 역사는 신라 때부
김포초등학교는 1907년 9월 7일 대한제국 시절 김포 최초로 설립된 신식 교육기관이다. 구한말인 1894년 서울 교동 소학교가 최초로 설립된 지 십몇 년 후에 ‘김포 보통학교’라는 교명으로 등장한 것이다. 주민들은 이 신식학교를 개화 서당이라고 불렀다. 본래 1898년 김포향교 명륜당에 설립된 소학교를 보통학교로 개편해서 군청사 부속건물에서 4학급 남학생 80명으로 시작했다. 자세한 자료는 남아있지 않지만, 코흘리개 어린이부터 장가든 성인도 함께 섞여 있었다. 왜 사람들이 개화 서당이라고 했을까? 조선 시대에는 초등 교육기관을 서
김포 하성면에서 제일 많은 성씨는 여흥 민씨다. 고려 공민왕 때 민유(閔愉)가 일가를 이끌고 김포 봉상(현재의 전류리)으로 왔다. 지금의 서울대학 총장쯤 되는 대제학을 지낸 민유는 학문이 높았지만, 신돈이 개혁이라는 미명으로 박해를 가하니 그만두고 개성을 떠나 지금의 전류리에 정착한 것이다. 선비 주사옹의 일족이 들어와 함께 번성하니 민주촌(閔朱村)이라고 했으나 기묘사화로 심달원이 약암리에 유배 온 이후 주씨는 많이 떠나고 심씨가 많아져서 북민남심(北閔南沈)이라고 불렀다. 나라가 망할 조짐이 보이면 몇 가지 징후를 볼 수 있다. 망
매년 수능시험 때가 되면 수험생을 둔 가정은 긴장감에 휩싸인다. 시험 당일에는 이날 하루 시간이 멎는다고 할 정도이다. 이런 수능을 중고교 6년, 아니 초등학교 때부터 준비하는 학생도 있다. 좋은 성적을 거둬 명문대에 입학하는 것이 최종목표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울퉁불퉁 자갈길을 가느냐 쌩쌩 고속도로로 가느냐가 이 한 번의 시험으로 결정된다. 학력철폐, 학벌 없는 세상을 말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명문대를 들어가는 것은 훌륭한 교수의 가르침으로 실력을 쌓고 힘을 보태줄 수 있는 인맥을 얻을 수 있다. 명문대는 명품
11월 7일 자정에 덕포 나룻터 앞의 부래도(浮來島)에 집결했다. 부래도를 떠나 강화해협을 건넌 뒤에 정족산성으로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승선하려고 하니 훈련받지 못한 사냥꾼 출신 포수들은 머뭇거리기만 했다. 화가 난 양헌수가 칼을 빼어 들고 소리쳤다. “겁나면 모두 물러가라. 나 홀로 싸우겠다”, 하니 그제야 용기를 내었다. 조카가 쫓아와 편지와 옷보따리를 건네주었지만 “살아 돌아오지 않겠노라” 말하고는 옷보따리를 내던졌다. 제1진으로 떠난 배가 얼마 가지 않아 배를 돌리라는 외침이 들리는 것이 아닌가. 어떤 비겁한 자
김포는 사방이 물로 둘러싸인 도농복합도시다. 염하(강화해협)와 한강 그리고 최근에는 아라뱃길로 섬이 되었다. 물가를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구석기시대부터 거주해 청동기 때는 자그마한 나라도 세워 유적이 남아 있고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빼앗고 빼앗기는 격전지이기도 했다. 조선 때도 한강 하구(조강)는 군사요충지였다. 배를 이용해 외적이 침입할 때 여기서 막지 못하면 곧장 서울로 진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지정학적 위치에서 구한말에 한반도의 운명을 가를 중대한 사건이 김포를 온통 흔들어 놓았으니 그것이 바로 병인양요(
모든 전쟁은 참혹하다.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을 앗아가고 집이 불타고 재물이 약탈된다. 사람들은 농담처럼 말한다. 전쟁 때문에 부모가 돌아가신 것은 잊어도 재산을 잃은 것은 쉽게 잊지 못한다고. 그런 소중한 재산을 본가는 물론이고 처가의 재산마저 몽땅 의병을 일으키는 데 쓰고 최후까지 홀로 싸우다 순절한 의로운 장군이 김포에 있다. 그 이름은 조선 4대 명문가인 청송 심씨 가문 출신의 심우신(沈友信)이다. 대대로 문관 벼슬을 했지만, 청백리 전통을 받든 가난한 집에 태어났다. 준수한 용모로 어려서부터 글쓰기와 독서에 열중한 그는
김포시에는 ‘평화문화 1번지’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홍보물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조강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이 대치한 접경지이니 김포시의 정체성이 ‘평화문화도시’라고 이름을 붙인 모양이다. 그러나 평화와 문화가 합쳐지니 모호한 구석이 있다. 평화의 가치를 전파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는데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홍보하는지는 시민들이 잘 모른다. 얼마 전 김포신문에서 ‘김포역사만들기 연구원’ 발대식이 있었다. 김포의 오래된 역사를 발굴하는 것도 있지만, 현재 역사도 찾아보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이에 나는 단군(檀君)을 김포의 상징으로
김포의 서북쪽 양촌 대포리에는 양성지의 영정을 모신 수안사가 있다. 가까운 곳에는 대포서원(원장 이화자)이 있고 양성지 부부의 쌍분 묘가 있다. 양성지는 세종 때 등과해서 성종 때까지 경륜을 펼친 고위관료이자 경세가이다. 그의 본가는 남산 밑에 있었지만, 이곳에 누각을 짓고 학문에 힘써 선비들이 학과 구름같이 모였다고 한다. 양성지의 호는 눌재(訥齋)로 사람됨이 신중하고 과묵하다는 뜻이다. 나라 운영의 설계에 필수적인 지도와 지리지를 만들고 국방면에서 탁월한 정책을 내놓아 세조로부터는 ‘조선의 제갈량’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이때 만
한반도에 터 잡고 산 우리 민족은 오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졌지만, 늘 가난의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수없이 많은 외침과 재해의 고난을 딛고 지금은 부자 나라, 선진국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런데도 돈 문제는 끊기지 않는다. ‘부자 되세요!’ 라는 광고처럼 부자도 많아졌지만, 여전히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도 많다. 부패도 여전하다. 일반인은 말은 많이 들었지만, 개념은 잘 모르는 것이 부패다. 어떤 공무원이 뇌물을 받았다든가 어떤 은행의 직원이 은행 돈을 슬쩍했다는 말로 구체화해야 그 뜻을 안다. 비로소 그것이 부패이고 나쁘다는 것을
새해가 밝았다. 요란했던 검은 호랑이해가 지나고 토끼해가 되었다. 부정부패의 네 글자를 보면 기분이 상한다. 음침한 구석에서 썩은 냄새 풍기는 토사물이나 강풍에 휘날리며 콧속으로 들어오는 미세먼지 같다. 우리 김포는 개발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도농 복합도시이다. 이런 곳에서는 인허가와 부지 선정에 따른 부패와 공직 인사의 부패가 생길 우려가 있다. 그동안 김포는 공직자들의 부패문제가 몇 건 터져 청렴도 면에서 낮은 평가를 받았고 그 뒤로도 간간이 들려오고 있다. 부패를 추방하려는 시민단체가 활동하고 있으나 실제 김포 내에 어
안녕하세요. 혹부리 풍문입니다. 재담을 약 2년에 걸쳐 김포신문에 (혹부리 영감의 김포이야기)를 연재했지요. 전국에 흩어진 전설은 물론이고 중국, 일본의 민담까지 들려 드렸지만, 이야기 밑천이 떨어져서 200회로 쫑을 쳤습니다. 마지막으로 감바위 밑에서 타임머신 배를 타고 김포를 떠났다가 다시 현대로 돌아왔습니다. 지금 김포의 작은 아파트에 기초생활 수급자로 살고 있습니다. 라떼는 아무 일도 안 하면 굶어 죽었지만 사백 년이 지난 대한민국은 부자나라가 되어 저 같은 사람도 살 수 있게 하는군요. 빈둥거리며 여생을 마칠 수도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