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진변호사
/변호사·본지 논설위원·북변동


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고대생 51%가 우리나라가 싫고 다시 태어나면 다른 나라를 택하겠다고 했다 한다. 무척 공감이 가지만 의외로 그 수가 적다는 느낌이다. 나는 적어도 70%정도는 될 것으로 생각해 왔다. 아마도 젊은 사람들이라 희망을 잃지 않아서 일까. 그나마 청년층이 중심을 잡고 있어 다행이지만 요즘들어 점점 더 정붙이고 살만한 구석이 없어지는 느낌이다.
대법원장까지 나섰다가 창피를 자초한 중국대사관 문서유실사건이나 이문열 책 장례사건에 이르면 도대체 이 나라가, 이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보선실패에 따른 집권당의 반성움직임은 대선주자들의 기선싸움으로 변질돼가고 있고, 국정을 책임진 대통령으로부터는 아직 시원한 메시지가 나오지 않고 있다. 야당이 더 여당의 난맥상에 대하여 걱정이 많다고 한다.
여가 무너지면 야도 없다는 이유다. 문서망신 외교부, 항공 2등국 건교부, 쌀파동 농림부, 뒷북꽁치협상 해양부, 난장판 교육부, 조선족 다죽이는 노동부, 웃기는 검찰과 법무부, 개악 의료보험 보건부, 북한에 더 신경쓰는 통일부, 기합빠진 국방부, 본업(간첩잡는 일) 잊어버린 안기부 등등 정부기능에 이상이 있다는 신호는 일일이 지적할 필요도 없을 지경이다.
이런 상황하에서도 무책이 상책인양 아무런 대처도 못하고 있는 정부여당을 보면 그대로 주저앉은 세계무역센터건물이나 삼풍백화점이 떠오른다.

어느 한구석이라도 든든해야

그렇다고 우리 사회가 건강한 것도 아니다. 작가 이문열 책 장례사건이 그 상징이다. 마음에 안든다고 어린 애에게 영정을 들게하고 책을 장사지낸 것은 현대판 분서갱유가 아니고 무엇인가. 자기들은 이문열이 마음에 안들었지만, 자기들이 마음에 안든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냥 조용히 있으라고 윽박지를 것인가. 민주주의는 다양성이다. 다양성은 관용이다. 관용은 인정(認定)이다. 나와 다른 주장을 인정못하면 성립할 수 없는 것이 민주주의다. 일당독재의 공산주의와 주자의 말과 한마디라도 다르면 사문난적으로 몰아부친 이조 도학자들과 정신세계에 있어서 다른 점은 없다. 한동안 효과적으로 상대편을 억압할 수는 있어도 완전히 말살할 수는 없다. 결국 끝없는 다툼과 상호후퇴만을 초래할 뿐이다. 우리 사회는 이미 공존의 지혜를 잃었고, 더불어 살수 없는 사회는 지옥과 다름 아니다. 이런 나라에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학생이 49%나 되는 것이 놀랍다. 내게는 한 국가의 사회적 정치적 유전자도 역사와 함께 선조에서 후손으로 이전된다는 가설이 진실처럼 보인다.
유학이 그토록 학문의 목표를 성인(聖人)이 되고자 하는 공부에 두었음에도, 과거 조선조 위정자, 학자, 양반들 가운데는 인격자보다 여러모로 비틀린 사람들이 더 많았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유전은 생물세계에만 있는가

신기독(愼己獨)을 기초로 성(誠), 경(敬)을 추구하였던 도학자는 위군자와 동의어가 되었고 백성들에게 내심으로 부터의 배척과 멸시를 받았다.
연암 박지원은 호질(虎叱)에서 겉으로 군자를 가장하고 뒤로는 과부와 사통하는 유생의 부패하고 위선적인 가면을 폭로한 바 있다.
조선유학사를 쓴 다카하시 도오루는 화친론을 주장하여 조국을 병자호란의 위기로 부터 구한 최명길을 공격한 유학자들의 태도를 이해할 수없다고 했다. 나도 그렇다. 삼전도에 나가 굴욕적인 항복을 할 수밖에 없었으면서도, 최명길이 아니면 죽을 수 밖에 없었으면서도, 다 지난 다음에 항복보다 죽음이 더 나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놀라운 희극이 아닌가.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일들도 위 유학자들의 사고방식에서 나온 행동과 다른점이 없다. 어느 길이 합리적인 길인지는 안다. 그러나 그 길을 따라가면 내 몫은 없다. 결국 내 이익이 있는 곳에 정의가 있다고 우겨보는 것이다. 우기다 보면 마치 그게 진짜인듯 한 착각이 들고, 나중에는 아주 믿게 된다. 위선을 구별할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사색당을 결성하여 죽고 죽이고, 나라가 망할 때까지 환타스틱하고 장렬하게 싸운 조상들의 위업이 오늘의 현상과 겹쳐져서 한없이 침울한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과민반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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