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양공대종회 눌재 기리기 위한 각고 노력

▲ ◇ 눌재 양성지 선생
▲ ◇ 대포서원
▲ ◇ 양재동 대종회 회장
엇저녁에 가을바람 불더니
길손들이 배를 타고 돌아오네.
파수막에서 쉬어가는 게 어떠하리
서리 밟은 짚신이 모닥불을
에워싸네.

이 시는 눌재 양성지 선생이 공직생활을 떠나 김포에 내려와 대포서원 인근 목안정에 앉아 지은 시이다. 지친 나그네에게 휴식을 권유한다. 눌재집에 실려 있다.
민족의 역사적, 문화적, 독립성을 주장한 민족 주체사상의 선구자인 눌재 양성지 선생.
눌재 선생이 550년전 편찬한 동국지도는 현재 고구려사 왜곡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중국 동북공정의 반박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이 지도에는 제주에서부터 만주, 고구려,발해 지역까지 우리 국토로 표시돼 있다.
선생은 또한 이율곡 선생의 10만 양병설보다 수백년 앞선 세조시대부터 85만 양병설을 주청(奏請)했으며 대민 정책인 토지 분배, 보건소 설치 등을 주장한 선각자였다.
“선생의 의견이 반영됐더라면 7년간의 임진왜란과 일제의 36년간의 치욕적인 통치, 신미양요, 병인양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 토지 분배와 보건소 설치는 획기적인 사고(思考)였다.”
양재동 남원양씨문양공대종회 회장은 “양성지 선생이 미래를 예견한 선각자였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눌재 선생은 중국에 대한 종속적 사대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 고유의 전통을 고수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선생은 고유한복과 전통 국악악보, 예복, 흉대등 고유의 한국 전통 문화 양식을 창시하고 주청했다.
또한 역사 고증 서류등을 보관하기 위한 규장각 설치를 주청했으며 수백년 후 이를 토대로 정조대왕이 규장각을 건립하기도 했다.
이 같은 공덕을 기리기 위해 양촌면 대포리에 있는 선생의 묘소 밑에 1973 년 대포서원이 세워졌다. 대포서원은 김포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돼 있다.
건물은 좌측에 현대식 강당 그 후면으로 3문과 사당이 있다. 사당은 원주를 세워 결구한 팔작지붕의 익공(翼工)건물로서 정문 8.3m, 측면 3.7m 규모이다.
해마다 4월 25일이 되면 대포서원에서 관내 유림 250여명이 모여 선생을 기리기 위한 대제가 모셔진다.
또한 남원양씨문양공대종회(회장 양재동)는 음력 10월 중정일 대포리 문양공 양성지의 수안사 부조묘에서 시제를 지낸다.
대종회는 지난 2002년 불용지 처분, 헌성금등을 통해 마련한 10여억원을 들여 수안사 부조묘 정비와 신도비각, 신도비등을 건립했다.
또한 2002년 4월 10억원을 투입해 사우동에 지하 1층, 지상 5층의 눌재회관을 세우기도 했다. 올해도 시비 2억원을 지원받아 대포서원에 동제를 신축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벌여왔다.
이와 같은 대규모 사업은 지난 99년 양재동 회장이 부임하면서 이뤄졌다. 대종회 자체적으로 양회장의 공적비 건립 계획이 수립될 정도로 종친회의 양회장에 대한 신임은 두텁다.

한편 대종회는 오는 10월 김포 문화예술제에서는 성균관 최근덕 관장과 이광호 연세대교수, 이승환 고려대 교수등을 초청 눌재사상학술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이외 知止不殆 知足不辱(그칠줄 알면 위험하지 않고 , 만족할 줄 알면 욕을 보지 않는다.)등의 운을 띄워 관내 초·중·고생들에게 눌재선생을 알리기 위한 휘호대회, 점토대회, 사생대회도 열 계획이다. 눌재 양성지 선생의 공덕을 기리기위한 깃발전시도 계획돼 있다.

홍문관 대제학, 대사헌, 공조판서 지낸
양성지 [梁誠之, 1415~1482] 선생 업적

본관 남원(南原). 자 순부(純夫). 호 눌재(訥齋). 시호 문양(文襄). 1441년(세종 23) 진사와 생원에 합격하고,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뒤 경창부승 ·성균관주부를 거쳐, 이듬해 집현전(集賢殿)에 들어가 부수찬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 겸 고려사수사관(高麗史修史官)으로 《고려사(高麗史)》 개찬(改撰)에 참여하였다.
이어 집현전직제학(直提學)에 승진, 1453년(단종 1) 왕명으로 《조선도도(朝鮮都圖)》 《팔도각도(八道各圖)》를 작성하고, 이듬해 《황극치평도(皇極治平圖)》를 찬진(撰進)하였다. 1455년(세조 1)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를 편찬, 1463년 왕명으로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찬진하고 홍문관(弘文館) 설치를 건의하여 책을 보관하게 하였다.
1469년(예종 1) 중추부지사(知事) ·홍문관제학(提學) ·춘추관지사를 겸직하며 《세조실록》, 1470년(성종 1) 《예종실록》 등 편찬에 참여하고, 공조판서를 거쳐 1471년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으로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졌다.
1477 년 대사헌에 재임되었고, 1481년 홍문관대제학(大提學)으로 《동국여지승람》 편찬에 관여하였다.
그해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 1482년 서적의 인간(印刊) ·수장(收藏)에 관한 12조의 건의문을 올렸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났으며, 문집에 《눌재집》, 저서에 《유선서(諭善書)》 《시정기(時政記)》 《삼강사략(三綱事略)》 등이 있다.
별칭 자 순부(純夫), 시호 문양(文襄), 남원군(南原君) 으로 불리었다.

/김만구 기자
동국지도, 중국 동북공정 반박자료로 활용













저작권자 © 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