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양촌면 오라니장터 3.1운동 만세 유적지
◆ 오라니 장터 ◆

김포에서도 3.1운동이 있었다. 김포는 서울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 1919년 3월 23일 양촌면 오라니 장터의 만세시위운동을 시작으로 5월까지 총 7회의 집회가 있었고 5,000여명의 군중이 참여하는 등 만세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 후 일본군은 우리의 독립 의지를 뿌리뽑기 위해 무자비한 헌병·경찰제도를 신설, 운영하게 된다. 이에 우리 민족은 끊임없는 저항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해왔고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의 종교 지도자들이 연합,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1919년 3월 1일 종로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를 펼쳤다. 이를 계기로 독립만세운동은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김포의 만세시위도 이러한 맥락에서 시작되었고 서울에서 3.1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귀향한 청년·학생들이 시위를 주도하였고 민중들도 동참하게 되었다. 특히 면 단위 중 조직적이면서 대규모로 시위한 곳이 바로 3.1운동 만세 유적지가 있는 양촌면 오라니 장터의 만세시위운동과(현재의 양곡시장) 월곶면 군하리의 만세 시위운동을 꼽을 수 있다.
오라니 장터의 만세시위운동을 당시 기록을 토대로 살펴보면 서울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귀향한 임철모 선생이 주도면밀하게 계획, 1919년 3월 23일 양곡 장날 300여명의 군중들과 함께 면사무소와 학교, 주재소를 돌며 대한독립 만세시위운동을 펼쳤던 역사적인 현장이다.
거사 후 임철모 선생은 안타깝게도 서울에서 출동한 헌병대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많은 고문을 받아 그해 5월 10일 숨졌다. 선생의 장례를 위해 서대문 형무소에서 선영인 대곶면 초원지리까지 운구하는데 3일이나 걸렸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선생의 운구행렬이 48번 국도를 지날 때 이 소식을 접한 인근 주민들이 몰려와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고 조문하는 인파가 몰려들어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파 때문에 운구 행렬이 지체되어 한나절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를 3일이나 걸렸다는 것은 당시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말해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독립만세운동 주동 임철모·정인섭 선생

오라리시장(현재의 양곡시장)에서 만세독립운동을 주도한 임철모 선생은 1919년 3월 23일 사거리의 주변 4개의 면에서 모인 군중과 더불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한말 통정대부 임승필의 장남으로 직접 참봉직을 역임하다가 다시 사립 분남학교(汾南學校)를 졸업하여 신구학문을 겸비한 인물이었으므로 자연히 이 지역의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따라서 3.1운동의 김포지역에 관한 통첩은 그에게 당도하였고, 그가 주도한 만세운동이 가장 규모도 크고 희생도 많았던 사건이었다. 그는 3.1운동의 밀첩(密牒)을 받고 즉시 동지인 정인섭, 이효원, 박충서 등과 함게 진행계획을 밀의하고 태극기를 몰래 제작하여 배포하였으며, 거사 당일에는 만세운동을 진두 지휘하였다.
거사 후 그는 출동한 용산 헌병대에 체포되었고,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어 많은 고문을 받았고, 마침내는 식음을 전폐하다가 5월 10일에 순사(殉死)하였다.
이와 함께 거사를 주모하였던 정인섭 선생은 대곶면 초원지리에서 서당 교사를 하고 있었다. 정인섭 선생은 임철모 선생과 거사를 하였던 1919년 임선생보다 한 살이 적은 36세였으며, 경성지방법원의 재판결과 임철모 선생은 징역 8월, 정인섭 선생은 1년의 징역형에 처해졌다.
이 시위는 양곡 장날을 이용한 거사였는데, 당시 서울에서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귀향한 박충서, 박승만, 전태순 등과 박승각, 오인환, 정억만, 인성환 등이 주동이 되어 태극기를 만들고, 격문을 쓰고, 경고문을 작성하여 장날 만세를 불렀다. 이 만세 시위사건에 참여하였다가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은 결과 박승각과 박승만은 각각 1년의 징역형을 받았으며, 박충서는 2년형을 받았다.
그리고 누산리에 사는 박충서는 학생으로 서울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하고 고향에 돌아온 사람으로, 향리의 동기들인 박승각, 박승민, 안성환, 전태순, 오인환, 정억만 등과 함께 3월 19일 안성환의 집에 모여 독립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계획하고 격문과 ‘독립만세를 부르기 위하여 모이라’는 통문을 작성하여 양촌면내의 각 마을에 배포하였다.



시위참여자들에 대한 당시 판결문 일부

《판 결》
경기도 김포시 양촌면 누산리 학생 박충서(朴忠緖) 22세
위와 같은 곳 농업 박승각(朴勝珏) 23세
위와 같은 곳 농업 박승만(朴勝萬) 24세
위와 같은 곳 농업 안성환(安聖煥) 32세
위와 같은 곳 농업 전태순(全泰順) 24세
위와 같은 곳 농업 오인환(吳仁煥) 21세
위와 같은 곳 농업 정억만(鄭億萬) 27세
위 보안법 위반 피고사건에 대하여 총독부 검사 최호선(崔浩善) 관여로 판결함이 다음과 같다.

《주 문》
피고 충서를 징역 2년, 피고 승각·승만·억만을 각각 징역 1년, 피고 성환·태순·인환을 각각 징역 8월에 처한다. 압수물건 중 증 제1호 및 제3호∼제16호는 이를 몰수하고, 기타는 이를 소유자에게 반환한다.

《이 유》
피고들은 모두 조선독립을 희망하고 있었던 바 대정 8년 3월1일 손병희(孫秉熙) 등이 조선독립을 선언하자, 크게 그 취지에 찬동하여 모두 정치 변혁을 목적으로,
제1. 피고 충서는 (중략)
제2. 피고 충서·승각·승만·성환·태순의 5명은 동월 19일 피고 성환 집의 골방에서 회합한 후 독립시위운동 개최에 대하여 협의한 끝에 이에 관하여 비분강개한 격문과 ‘독립만세를 부르기 위하여 모이라’는 취지의 경고문 10수 통을 작성하고, 이에 피고 충서·승각·성환·태순과 위 피고들의 계획에 찬동한 피고 인환·억만의 7명은 각자 부서를 정한 다음 그 격문 및 경고문을 경기도 김포시 양촌면 내의 각 곳에 배포하여 민심을 선동하고,
제3. 피고 충서는 동월 23일 구 한국 국기를 속에 품고 동면 양곡(陽谷) 시장에 가서 그 곳에 접합한 수백 명의 군중을 선동하고, 피고 승각·승만·억만은 이에 가담하여 위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침으로써, 정치에 관하여 불온한 행동을 함으로 말미암아 안녕 질서를 방해한 자이다. 또한 피고 충서·승각·승만·억만의 각 소위는 모두 계속할 의사로 행동한 것이다. 이상의 사실은, 피고들이 당 법정에서 말한 당해 각 판서와 같은 취지의 공술과, 압수한 판시 한국 국기·격문 및 경고문의 내용에 부합되는 종이로 만든 한국 국기, 격문 및 경고문의 존재함에 의하여 이를 인정한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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