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가현산
▲ ◇ 깜딱산
▲ ◇ 양촌면 대포리 소재 대포서원 전경
■문화재
대포서원(大浦書院)
지정번호 : 향토유적 제1호
지정년월일 : 1986. 3. 30
소 재 지 : 양촌면 대포리 산32-3

조선전기의 대학자이며 문신인 양성지(梁誠之, 1451∼1482) 선생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우(祠宇)이다. 선생의 자는 순부(純夫), 호는 눌재(訥齋), 송파(松坡) 본관은 남원(南原), 구주(九疇)의 아들이다.
세종 23년(144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이후 훈구파의 중진으로 집현전(集賢殿)에 들어가 고려사 개찬(改撰)에 참여했고 팔도지리지 동국지도 등을 찬진(撰進)했다. 세조9년(1463) 홍문관의 설치를 건의하여 역대 서적을 보관케 했고 10조의 상소문을 올려 학문 발전을 꾀하도록 했다.
예종1년(1469)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홍문관제학,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직 세조실록,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성종2년(1471) 좌리공신3등으로 남원군에 봉해진 후 대사헌(大司憲), 성종12년(1481) 홍문관 대제학으로 여지승람(與地勝覽) 편찬에 참여했고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일찍이 정보15년(1791) 정조가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고 그 제안자인 문양공(文襄公)의 공적을 치하하기 위한 서원건립을 하명, 출생지에 월곡서원(月谷書院)이 창건되었고 만년(晩年)을 지낸 통진(通津)에 서원 건립을 주선했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1973년 양촌면 대포리에 있는 선생의 묘소 밑에 사우를 창건하였으며 그곳 지명(地名)을 따서 대포서원(大浦書院)이라 했다.
건물은 좌측에 현대식 강당 그 후면으로 3문과 사당이 있다. 사당은 원주를 세워 결구한 팔작지붕의 익공(翼工)건물로서 정문 8.3m, 측면 3.7m 규모이며 1986년 3월 30일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되었다.

깜딱산

양촌면 양곡에서 마송으로 가자면 흥신2리와 대곶면 경계에 걸쳐 있는 산이 있다. 이 산을 깜딱산이라고 하는데 이 산은 원래 양촌·대곶·서해안선까지 닿을 정도로 깊은 산이었다. 산이 울창하여 빽빽한 나무, 지저귀는 새, 뛰어 노는 짐승들이 많았다 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산의 정상을 정복한 사람이 없었고 감히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곳이라 했다. 또한 이 산은 명산이라 전국 방방곡곡에서 힘센 장사들이 산의 중턱에 모여 활쏘기와 무예를 닦던 장소로서, 이 산에 올라가 보면 장사들의 팔씨름 받침대로 써서 생긴 사람 팔꿈치 모양의 모습이 찍혀 있는 듯한 바위가 있다.
그 당시 어느 날 장사들끼리 힘이 제일 센 장사를 가려내기로 하였는데 결론은 먼저 이 산의 봉우리를 정복하는 제1인자를 두목장사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중 한 사람이 그 곳에는 우리 마을을 지키는 용이 있는데 우리가 올라가면 그 용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안된다고 했다. 그러나 장사들은 그 말에 더욱 흥미를 가지고 그 말이 참말인지 거짓인지 올라가 보자고 하였다. 장정들은 마침내 산을 오르게 되어 울창한 나무와 깎아지른 듯한 바위를 기진맥진하여 오르는 데 몇 달이 걸렸다.
이리하여 몇몇 장사가 산 정상에 다다르게 되어 기쁜 마음으로 한 장사가 정상에 있는 바위에 발을 디뎠다. 그 순간 맑은 하늘에 일진광풍이 일며 폭음과 함께 산은 부서져 내려앉아 바위가 메워지고 산이 뿔뿔이 흩어져 눈깜짝할 사이에 산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현재 남은 작은 산 정상에 장사들만 남게 되었으므로 이 산은 그 당시에는 ‘눈깜딱산’이라고 일컬었으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말이 바뀌어 ‘깜짝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가현산(歌絃山) 호랑이

옛날 가현산 밑에 조그마한 가현(歌絃)이라는 마을에 나무를 해서 파는 나무꾼이 있었다. 노모와 처자식을 거느리고 어렵게 살았는데 어느 날 나무꾼이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러 가현산 깊은 산 속에 들어갔다가 호랑이를 만났다.
호랑이가 나무꾼을 잡아먹으려고 달려드는데 나무꾼은 호랑이에게 대항도 도망도 할 수 없어 지게를 진 채 엎드려 형님이라고 말하면서 반갑게 다가서자 호랑이는 어이가 없어 호통을 쳤다. 그러자 나무꾼은 어머님이 늘 말씀하시던 형님이야기를 했다. 형님은 어릴 적에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돌아오지 않았으며 어머님 꿈속에 형님이 호랑이가 되어 나타나곤 하여 호랑이로 변신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호랑이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디서 태어났는지 부모님이 누구인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자 자기가 그 나무꾼의 형님으로 알고 이 모양으로 어머님 앞에 나타날 수 없다고 말하며 한 달에 두 번씩 돼지 한 마리를 갖다줄 터이니 동생이라도 어머님을 잘 모시라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나무꾼은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기고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그 후 정말로 한 달에 두 번씩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뒷문 울타리 안에 돼지 한 마리씩이 놓여 있었다. 호랑이가 약속대로 갖다놓은 돼지였다. 그 해가 가고 겨울이 되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 후부터는 돼지도 호랑이도 만나볼 수가 없었다.
나무꾼은 웬일인지 궁금하게 지내다가 하루는 산으로 들어가 보았다. 호랑이 집 주위에서 귀여운 호랑이 새끼 세 마리를 만났는데 꼬리에 베 헝겊을 매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무꾼은 하도 이상하여 물어보았더니 호랑이 어미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그 날부터 굴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굴속에만 들어앉아 음식도 안 먹고, 어머니만 부르며 울다가 죽었다고 새끼호랑이가 나무꾼에게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나무꾼은 자기가 죽을까봐 거짓으로 호랑이를 보고 형님이라고 했는데 정말로 호랑이가 의리를 지키고 어머님께 효성을 다한 것에 감탄하여 눈물을 흘렸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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