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형
안동대학교
(철학)명예교수

세상이 시끄럽다. 온갖 사람이 나서서 자기가 아는 것을 있는 대로 떠들어 대기 때문이다. 못나고 힘없는 사람들은 찍소리도 못하고 수난을 당하고 있다. 난세이다. 돌아보면 난세가 아닌 적이 있었나. 그런데도 결국 사람들이 신뢰하는 것은 난세를 통과한 보편적 진실이다. 허언이나 호언장담 혹은 요설에는 없지만, 진리를 머금은 참말이 가진 조건이 있다. 

대표적인 두 가지만 생각해 보자. 
‘나는 안다’라는 뜻은, 첫째로, 나는 내가 말하는 것이 세상에 있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이때 이 앎은 내가 말하는 명제(문장)와 그 명제가 가리키는 사실이 세상에 있고, 또 그 둘은 일치한다는 사태를 가리킨다. 예를 들면, “여의도에는 국회의사당이 있다.”라는 명제는 실제로 ‘여의도라는 곳에 국회의사당 건물이 있다’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따라서 명제와 사실이 서로 일치하는 관계 즉, 참이 된다. 

이런 주장을 진리의 일치설 혹은 진리 대응설이라고 한다. 주장(명제)과 사실(실재)이 서로 마주 대응한다는 뜻이다. 
이런 진리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경험론자들이다. 예를 들어, ‘김갑돌은 어제 이을순에게서 지갑을 훔쳤다’라는 주장이 참(사실)이 되려면, 어제 김갑돌이 이을순에게 갔고, 이을순이 가진 지갑을 훔치는 장면을 본 사람이 있으면 쉽게 성립된다. 

혹은 이런 장면이 찍힌 CCTV가 있어도 사실 여부가 판명된다. 우리는 그것을 객관적으로 볼(경험할) 수 있고, 그것을 보는 사람은 그렇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진리설은 일상생활의 상식이며 십중팔구는 진리를 이렇게 이해한다.  즉, 우리가 “무엇을 안다”라고 주장할 때, 참이란 그 주장과 사실이 일치한다는 뜻이다. 흔히 법정에서 송사를 다룰 때 고등법원까지는 원고와 피고의 주장의 진실 여부를 이렇게 따진다. 

 둘째로, ‘안다’라는 것은 주장하는 명제와 그것이 가리키는 사실과의 일치 여부를 따지지 않고, 주장하는 명제가 기존의 지식(상식)체계와 일치하는가를 따진다. 일치할 때 참(안다)이라고 한다. 예컨대 ‘나는 1+8의 답을 안다’라는 주장의 진실 여부를 덧셈 공식이라는 기존의 원리에 일치하는가로 따져보자. 안다고 해놓고서 막상 내놓은 답이 10이라면, 안다는 주장은 거짓이다. 1+8=10이라는 셈은 1+8=9라는 셈이 속한 덧셈 공식에 불일치하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을 진리 정합설이라고 한다. 

진리 정합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주로 합리론자들이다. 주장이나 판단이나 명제의 참, 거짓을 문제 삼는 경우 그것이 수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빈틈이 있는지만 따지지, 사실과 일치 여부는 무시한다. 예를 들어, ‘10은 8보다 크고, 8은 6보다 크다. 따라서 10은 6보다 크다.’ 
이 주장은 참이다. 수의 대소에 관한 기존의 지식 체계에 맞기(정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따라서 10은 6보다 작다’라는 결론을 낸다면 지식체계에 맞지 않으므로 거짓이다. 이런 진리 정합설에 해당하는 경우는 대법원의 심판이다. 

최고사법기관인 대법원에서는 고등법원에서 올라온 판결의 법리적 정합 여부만 최종적으로 따진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정치의 계절을 맞아 불신과 음해 그리고 폭력적 언어가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고 있다. 온갖 소문의 밑바닥에는 죄다 진실 공방이 깔려있다. 진실을 표방하지만 어떤 주장이 참이 되려면 그것이 사실에 대응하거나 기존의 정설에 정합하거나 둘 중 하나의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그것은 진리의 조건을 갖추지 못한 말이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 하더라도 참 주장이 되려면 이 두 조건 중 하나를 충족시켜야 한다. 참된 주장은 반성을 거쳐도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반성의 틀인 이 두 조건은 그래서 중요하다. 이런 반성을 거칠 때 잡다한 허구적 말 잔치는 품격있는 공론의 장으로 아름답게 바뀌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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