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준

김포중앙교회

원로목사

40여년  간 오로지 목회에만 전념하며 목양의 삶을 살다가 은퇴를 하니 내 주변에 혹 젊은 후배들이 있으나 은퇴한 나와는 거리가 먼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다. 30여 년 전에 고척교회에서 시무하시다가 은퇴하신 김재권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은퇴한 목사는 은퇴하는 순간 시무하는 목사와 종자가 바뀌니 그들과 어울릴 수 없다.” 그 때는 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나 지금 생각하니 그 말씀이 명언이었다. 혹시 자문을 요청할 때라면 모르지만. 그래서 모이게 된 것이 신학대학교 동기들 중에 은퇴한 뜻이 맞는 6부부가 매 주일마다 각 가정으로 돌아가면서 모여 예배드리며 친교를 나누니 장신대 70기이므로 우리는 ‘칠공교회’라고 한다. 이 날은 지난 날 목회하면서 있었던 일들을 회고하며 지난 한 주간의 삶에서 신앙적으로 쌓였던 문제들을 털어놓고 대화하며 마음껏 즐긴다.

 평일에는 고향에 좋은 친구들 여럿이 있었으니 무엇보다도 나의 집 정원에 시비를 세워준 6명의 친구들이 매월 1회씩 모여서 식사를 하며 교제해 오고 있으며 가정 대소사에 함께 축하해 주며 때로는 격려하며 교제하기도 한다.

 그리고 특별히 가깝게 지내는 친구 둘이 있으니 조휘철, 이종훈이다. 조휘철은 중학교 시절 나와 한 의자에 앉아 공부하던 친구요, 이종훈은 초등학교에 같이 다니다가 6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갔던 친구다. 우리 세 사람은 성격이 각기 다르고 자란 환경도 물론 다르다. 우리는 10대 때에 헤어져 70대가 되도록 다른 환경 속에서 살다가 50여 년 만에 다시 만났으니 너무 오랜만이다. 물론 가끔 만나는 일은 있었지만 그 때는 동창생으로 만났을 뿐 깊은 우정을 나누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기회에 내가 존경하는 이중찬 선배의 제안으로 우리 세 가정 부부를 비롯하여 네 가정이 일본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이곳저곳을 관광하며 온천을 하며 즐겁게 지내다가 마지막 날 저녁, 우리는 참으로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시간을 가졌으니 이 선배의 제안으로 ‘지난 일생을 살아오는 동안 추억에 남는 일을 돌아가면서 이야기 해보자’는 것이다.

 먼저 [휘철]은 홀어머니와 할아버지 할머니 슬하에서 자라면서 아비 없이 자라 버릇없다는 말 듣지 않게 키우시려는 할아버지의 혹독한 훈계를 받으며 자랐지만 한편 유복한 생활에 고등학교 때 서울로 유학을 하여 공부하고 졸업을 한 뒤 연로하신 어른들만 계신 고향 집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는 형편이어서 대학에 가지 못한 안타까움을 안고 열심히 농촌생활을 하면서 일찍 결혼하여 2남 2녀의 자녀를 두고 행복한 삶을 살면서 김포 지역사회에서 선거관리위원회와 금융계 등에서 많은 활동을 하며 지역 유지로서의 삶을 살던 중 아내가 암 판정을 받았을 때는 절망감마저 들었다며 우리 네 가정이 있는 자리에서 북받쳐 흐르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흐느끼며 간증을 하는 것이다. 그의 아내를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시조부모님과 시어머니를 섬기며 4남매를 키워온 아내가 중한 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워 네 자녀들과 힘을 모아 온 정성을 다해 아내의 병 수발을 하여 회복한 뒤 더 이상 힘든 농촌에서 살아서는 안 되겠다 싶어 70여 년을 가꿔온 농토를 뒤로하고 운양동에 좋은 아파트를 마련하여 이사를 하였으며 지금은 건강을 회복한 아내와 함께 분가한 4남매의 섬김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감사하다고 간증하였다.

 [종훈]은 외갓집에서 살다가 6.25당시 임진강을 도강하여 넘어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형제가 어렵게 자랄 때 서울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계시는 숙부님께서 집안의 장손을 공부시키신다며 불러올리셔서 어린 나이에 서울에서 유학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 넉넉하지 못한 숙부님의 가정에서 여러 사촌들 틈에 추운 겨울 난방장치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다다미방에서 고생하며 학교에 다니면서 몇 번을 다시 시골로 내려오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어머니의 간곡하신 나무람을 들으며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다가 군 제대를 한 후 결혼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전공을 살려 사업을 시작하면서 많은 어려움과 역경을 딛고 지금의 사업장을 키웠으며 지난날 공부할 때 힘들었던 일을 생각하며 어려움 중에 있는 학생들을 도와야겠는 심정으로 각종 장학회에 몸 담아 헌신하던 중 김포시민장학회 이사장을 지낼 때는 더 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 혜택을 주기위해 노력하여 이전보다 배나 되는 장학금을 전달하는 등 헌신하던 삶을 눈물겹게 간증했다.

 나도 가난한 가정 형편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강의록으로 공부하면서 농촌 지도자의 꿈을 갖고 지내다가 복막염 수술로 건강을 잃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지인의 도움을 받아 서울로 올라가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일생을 성직자의 삶을 살게 되었던 일을 간증 했다.

 우리는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정담을 나누었던 그 이후, 더욱 깊은 우정의 관계를 쌓게 되었으며 우리 스스로 “우리는 친구 삼총사다”라고 하며 이종훈 회장의 사무실에서 자주 만나 건강문제를 비롯하여 가정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허물없이 내어놓고 이야기하며 매일 전화로라도 만나지 못하면 궁금해 하는 사이가 되었으니 우리는 서로 ‘누구도 세상을 먼저 떠나지 않도록 건강관리 잘 하자’고 격려하니, 우리 셋이 만나면 마치 오늘이 생일인 것처럼 즐거우니 역시 우리는 친구 삼총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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