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화해할 시간입니다 제4회

최영찬 소설가

나는 하성면 전류리 태생입니다. 다섯 살 때인 6. 25 때 아버지는 경찰에 의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버지는 똑똑하고 부지런해서 구장(이장)을 맡아 동네일에 힘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좌익 활동을 한 적 없건만 왜, ‘빨갱이’가 되어 젊은 나이에 시신도 남기지 못하고 무참하게 돌아가셔야 했나요. 저는 왜 부역자의 아들이 되어 뒤에서 손가락질당하고 불이익을 당해야 했나요.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불쌍함이 그리움 속에서 뒤엉켜 자랐습니다.

강경구 전 김포시장

내가 살던 전류리는 한강과 가까운 곳에 있어 항상 물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를 늘 입에 올리셨습니다. 한강 제방도 막지 못하고 집 앞까지 물이 들어와 쪽배를 타고 다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대홍수는 대흉년을 낳는다고 하셨지요. 그때는 어렸을 때라 그 의미를 몰랐습니다.

그것을 안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입니다. 한낮이 밤중같이 캄캄하고 태풍이 몰아치는 바람에 교실에서 벌벌 떨다가 조금 멎은 틈을 타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물이 넘쳐 바다처럼 된 하천에 여러 마리의 뱀이 나뭇가지에 걸린 것을 보았습니다. 이때 놀랐는지 가끔 홍수로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꿈을 꾸곤 했습니다. 김포평야에 짠물이 섞인 강물이 넘치는 날에는 농사를 망치는 대재앙이 되기 때문이지요.

이런 기억이 김포농고를 졸업하고 공직의 세계에 발을 디딘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농사꾼의 길도 싫지는 않았지만, 1970년 4월 10일 지방농업기원보(9급)가 되었습니다. 그 뒤에 지방공무원 전직시험을 통해 지방행정주사로 임용했습니다. 그렇지만 연좌제가 있던 때라 줄곧 경찰의 감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남북접경지역이라 북한에 이로운 정보를 넘길 수 있기에 그럴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다가도 어떤 때는 화가 치밀기도 했어요. 아버지가 좌익 활동을 한 것도 아니고 동네 구장으로서 해오던 일을 했는데 너무하다고 말입니다.

돌아가셨을 당시 24살의 청년이었던 아버지는 무슨 꿈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냥 농사나 지으면서 그럭저럭 사시려고 했을까요. 그러시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런 분이었다면 동네의 궂은일을 앞장서서 해결하는 구장 일을 하셨을 리 만무하다고 단정했습니다.

그러자 생각이 바뀌더군요. 아버지의 삶이 끝나는 나이에서 시작한 나의 공무원 생활 속에 아버지의 꿈도 함께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부터 나는 일인지고 만인지락(一人之苦 萬人之樂)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아버지가 억울하게 부역자로 몰려 돌아가셨지만 나는 김포에서, 대한민국에서 인정받는 공무원이 되겠노라 마음먹었습니다.

김포를 위해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목표를 두니 할 일이 보이더군요. 부역자 가족이라는 딱지로 비밀문서를 취급하는 직책을 맡을 수 없다가 1983년 연좌제가 풀어지자 비로소 총무계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김포읍 사무소를 이전해야 하는데 부지를 확보해야만 건축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부지를 선정한 다음에는 서울에 사는 토지주를 비롯해 6명의 토지 소유주를 찾아다니며 무상 기부를 받았습니다. 1995년 지역경제과장 당시에는 김포에서도 배농사가 가능한 것을 알고 Y자형 배를 도입해서 재배농가 묘목대를 지원했습니다.

그 결과 품질 좋은 배를 생산해서 수출했습니다. 1996년 통진면장으로 통진문화회관을 지을 때 이미 설계도면과 건축허가가 있었지만, 너무나 협소한 부지라 파기하고 새로운 부지를 찾아 나섰습니다. 이번에도 시예산으로 매입하기는 어려워서 땅을 무상으로 기부 받아야 했습니다. 경남 거창을 세 번이나 내려가 토지주를 설득해 300평의 땅을 기부 받는 등 총 6명의 지주에게 1,174평을 기부 받아 실내 수영장도 구비 된 문화회관을 설립했습니다. 이런 노력에도 기존의 설계비를 포함한 비용발생으로 징계위원회에 회부 되었습니다. 하지만 통진면민에게 좋은 일을 했다는 긍지로 보람을 느꼈습니다. 통진 두레놀이도 내가 직접 연출 지도해서 전국 제38회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시켜 최우수상인 대통령상을 받았습니다. (현재는 두레놀이 보존회관이 설립되었습니다.) 태산패밀리 테마파크 부지를 확보하여 아름다운 공원을 조성해서 수도권지역 시민들의 놀이동산으로 만들었습니다.

여러 일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1990년 건설과 관리계장 당시 기록적인 폭우가 있었습니다. 김포는 농경지가 한강 수위보다 지대가 낮아 조수간만의 차이로 비가 많이 오면 농경지가 침수되곤 했습니다. 9월 9일부터 쏟아져 내린 비로 운양리 배수문이 걱정되어 낡은 차를 끌고 새벽 3시 반에 걸포리를 지나 샘재로 가는 도중 도로의 범람으로 시동이 꺼져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한참 만에 샘재 정미소까지 겨우 왔을 때 봉고차가 들이닥치더니 몇 명의 경찰관이 내렸습니다. 도망치듯 차를 달려온 것을 보고 때마침 도주한 살인강도로 오인한 것이었습니다.

새벽이 되자 집채와 소, 돼지가 떠내려오자 중학교 때 악몽을 떠올렸습니다. 한강변의 낮은 제방으로 강물이 넘쳐흐르자 1,000여 명의 군인들이 늘어서서 흙마대를 쌓았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물이 줄어들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일산제방이 터진 것이었습니다. 그때 우리 민군관이 한마음으로 막지 않았더라면 김포는 엄청난 피해가 있었을 겁니다. 그 뒤로 나는 과장, 국장을 거쳐 34년 4개월의 공직을 마치고 시설관리공단 이사장이 되었다가 2006년 김포시장이 되어 활동했습니다.

이렇게 아버지가 돌아간 나이에 공무원으로 시작한 저는 김포 발전에 헌신했습니다. 저와 함께 한 아버지도 이제는 저 세상에서 편히 쉬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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