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은 우리동네 15 <어느 날, 변두리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어느 날, 변두리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남해의 봄날, 김효경

문득, 어린 시절 읽었던 <비밀의 화원>(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메어리과 디콘, 콜린이 가꾸던 화원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다. 아직도 멋진 장미들이 넝쿨째 넘실대고 구근들이 땅속에서 활발하게 꿈틀대고 있을까. 다시 황폐해져서 죽은 듯 메마른 줄기들이 힘없이 늘어져 있을까. 아니면 갈아엎어져 골프장이나 호텔이 들어섰을지도 모른다. 병들고 메말랐던 콜린과 메어리를 통통하고 볼이 바알간 아이들로 바꿔주었던 비밀의 화원을 떠올리게 한 책이 있다. <어느 날, 변두리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남해의 봄날, 김효경, 2019)이다.

 

저자는 우울증으로 신경안정제에 의존하다가 도시 변두리 마을로 이사를 한다. 12월, 폭설이 여러 번 내린 겨울이었다. 조립식 단독 주택에서의 겨울 생활은 혹독하다. 그러나 봄이 오면서 황폐했던 마당에 날마다 이름 모를 싹이 새로 돋는다. 저자는 메어리가 처음 비밀의 화원에 들어가서 그랬던 것처럼 새싹들을 위해 ‘쭈그려 앉아 돌을 고르고 딱딱한 흙덩이를 부숴주었다.’(p.27) 정원을 가꾸면서 저자는 안도감을 느끼며 위로를 받는다. 자신 역시 비로소 화분에서 땅으로 옮겨 심어진 기분이었을까.

 

화분에 담긴 마가렛 꽃은 봄 한철 핀 후 시들어 버리지만 땅에 심으면 그중 몇 그루는 씨를 남겨 그해 가을에도, 다음 해에도 다시 잎과 꽃이 자란다. 정원에서도 바람 잘 불고 볕 좋은 자리를 골라 모종을 심고 물을 뿌리자 나도, 꽃도 제자리를 찾은 듯해 마음이 좋았다.(p.44)

 

겨울에 도착해서 만난 봄의 정원은 변두리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더 깊숙이 들어가면 ‘이웃이라는 우주’(p.44)를 만날 수 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엄마들은 이집 저집에 모여 수다를 떨었다. 저자는 이웃들의 집을 오가며 ‘수많은 가족들이 지지고 볶으며 사는 삶의 냄새’(p.48)를 맡는다. 단절된 도시 생활에서는 알 수 없었던, 이웃들의 다채로운 삶을 직접 들여다보니 ‘광활한 우주를 유영하는 듯한 기분’(p.47)이 든다고 말한다.

 

마을 전체가 놀이터 같아서 아이들도, 어른들도 금방 친구가 되었다. 어른들은 퀼트, 도자기, 프랑스어, 역사 등을 서로 가르치고 배우기도 했다. 아이들도 학원에 다니는 대신 부모들이 ‘품앗이 교육’으로 부담 없이 가르쳤다. 수업료는 대파 몇 뿌리나 부추 한 다발이면 되었다. 아이가 대가족 안에서처럼 자라는 걸 보며 저자는 ‘조금만 더 젊었다면 이 마을에서 둘째를 낳아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 마을에서는 나를 도와줄 사람들이 가득 차 있고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 속에서 살았다. 마을에서 문단속에 느슨해질 수 있었던 것도 훤히 뚫린 푸른 철조망 너머로 사방에 내 편이 있고 내게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달려와 줄 친구들이 가까이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신뢰하는 사람들과 살고 있고, 나 또한 신뢰받고 있다는 느낌은 안정감을 주었다. (p.64)

 

이쯤 되면, 대체 이 마을은 어디일까, 당장 거기로 이사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저자는 마을 사람들의 대화법 비결 첫 번째가 ‘자랑은 금기’라고 했듯, 자신이 마을에서 받은 위로와 행복이 반드시 그 마을에 이사를 와야만 누릴 수 있는 것인 양 자랑하지 않는다. 책을 읽어나갈수록 내가 살고 있는 마을도 충분히 ‘멋진 우주’일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나와 내 이웃들 역시 ‘변두리 마을’ 사람들처럼 서로 공감과 배려도 하고, 상처도 주고받고, 질투도 하며 ‘관계’라는 것을 형성해가고 있음을 자연스레 알게 된다.

 

그럼에도 저자가 살았던 마을은 분명 특별하다. 먼저 베푼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홍택 목사와 초기 이주민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학교 끝난 후 갈 곳 없는 아이들에게 도서관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장소가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안홍택 목사가 교회 사택을 선뜻 기부했다. 동네 사람들이 직접 벽돌을 나르고 나무를 잘라 공사를 도왔다. 많은 이들의 기부와 희생으로 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되는 작은 도서관이라면서 견학 오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p.159)

 

작은 도서관을 짓고, 돈 안 받는 가게를 만들고, 마을 음악회를 여는 특별한 마을이 생기기까지의 배경에는 대기업의 횡포에 대한 10년간의 저항이 있었다. ‘오랫동안 주민들이 제집 화장실조차 마음대로 고치지 못했던 보전지역 규제가 풀리고 알 수 없는 연유로 땅도 대기업에 헐값에 매각되었다’(p.163) 산 밑으로 포크레인이 왔다 갔다 하며 공사가 시작되었다. 주민들은 중장비 아래 드러눕고 광화문에서 시위했으나 결국 마을에는 저유소와 골프장이 들어왔다. 그럼에도 저자는 그 실패에서 ‘신뢰와 네트워크’라는 수확이 있었음을 밝힌다. 함께 싸웠던 주민들은 누구보다 끈끈한 관계가 되어 특별한 공동체의 마을을 만들어 낸 것이다.

 

권력과 자본에 대항해서 성공한 경우는 드물다. 거듭된 좌절의 경험은 사람들을 쉽게 외면하게 만든다. 자기 일이 아니면 발을 빼고, 질 것이 뻔하면 달려들지 않는다. 이 책은 외면하고 포기하는 이들에게 말한다. ‘함께’ 해도 실패하지만, 실패해도 ‘함께’일 수 있다고 말이다. 개인이 위로받고 행복할 수 있는 사회는 구성원이 함께 연대하는 사회라는 것을 일깨우고 있다. 사회학을 전공한 저자의 통찰이 빛나는 부분이다.

 

이 책을 우리 마을 사람들도, 다른 마을 사람들도 모두 읽었으면 좋겠다. 굳게 닫혀 있던 비밀의 화원을 열고 들어가 너른 우주와 대면하길, ‘연대’의 힘을 믿게 되길, 그것이 꼭 어느 특별한 마을에 가야만 받을 수 있는 혜택이 아님을 깨닫게 되길, 자신이 딛고 있는 땅에서 한 걸음 내딛는 용기를 가질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 한 걸음으로 ‘변두리 마을’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메어리와 콜린, 디콘의 화원이 갈아엎어져 다른 건물이 들어왔대도 그들은 또 다른 화원을 일구며 ‘함께’ 건강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이곳이 신기한 마을인 줄 알았더니 사실은 그저 오래된 마을 중 하나였다.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변했을 거라 추측했으나 지금 보니 오랫동안 그들 안에 있던 모습이 드러난 것일 뿐이었다.(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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