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 넝쿨 아래

 

이영혜

 

영동 학산 산비탈 포도밭

넝쿨마다 휘늘어진 송이송이에 손끝을 대니

왜 내 젖이 찡해지는지 몰라

막내 동생 젖 먹이던 젊은 엄마

탱탱해진 젖무덤이 떠오르나 몰라

넝쿨손처럼 핏줄 선 젖꼭지에서

아기 입안으로 흘러들던 엄마의 진액

그 오래된 기억 속의 즙이

왜 자꾸만 내 입안에 고여 오는지 몰라

부끄러워 커다란 이파리로 하늘을 가리고

아래로 늘어진 장엄한 저 포도 엄마 행렬!

뿌리에서부터 꿈틀꿈틀 휘감아 오른 줄기줄기들

그 핏줄로 다디단 젖 뻗쳐올라 와

터질 듯 하얀 분 배어 나오는

먹빛 알들에 입술을 대면

내 마른 유선에도 다시 젖이 도는지

왜 이리 아랫배부터 점점 뜨거워지나 몰라

초가을 포도 넝쿨 아래 서니

왜 이리 푹푹 엄마의 단내가 나서

나, 축축하게 부푸는지 몰라

 

 

<시감상>

여름과 포도는 같은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토종 포도보다 외국산 포도가 더 많은 세상이다. 단맛이 더 강해질수록 우리는 어린 시절 시골집의 포도에 대한 기억을 점점 더 잃어가고 있다. 엄마 젖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다 못해 아무 기억도 없다. 포도 넝쿨도 없다. 엄마를 기억 못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에 대한 기억을 못하는 것이다. 엄마의 단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팍팍한 삶이 모든 갖고 싶은 기억에서 나를 배제하고 있다. 엄마! 그립다.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이영혜 프로필>

서울대 치대, 치의학 박사, 불교문예 등단, 시집 <식물성 남자를 찾습니다>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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