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재 양성지 대종손 양원규 미래복지재단 고문

세종~성종까지 보필... <팔도지리지>, <동국지도> 등 편찬

사학, 지리, 병학, 의학 등 다양한 분야 관심과 깊이 보여

 

▲눌재 양성지 선생의 사당 앞에 선 대종손 양원규(오른쪽), 대종손부 김미경 씨.

지난달 양촌읍 대포리 눌재 양성지(1415~1482) 선생의 사당 앞 생가를 남원 양씨 종중에서 한옥으로 다시 짓고 당시 서거정이 지어준 ‘지족당(止足堂)’ 현판을 지당 이화자 대포서원 원장의 글로 새로 제작해 달았다. 이 집에 기거하며 사당을 돌보는 대종손 양원규(65) 미래복지재단 고문을 만나 김포를 대표하는 역사 인물 눌재 양성지와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

양성지 선생은 세종 23년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에 관직에 오른 이후 성종에 이르기까지 여섯 임금을 보필하며 40년 동안 관직에 있었다. 집현전에서 <고려사>를 개찬했으며 세조 1년 <팔도지리지> 편찬 후 세조 9년 <동국지도>를 찬진했다. 벼슬은 지춘추관사, 공조판서, 이조판서, 대사헌 등을 거쳐 성종 12년 홍문관대제학에 올랐다.

관직에 있는 동안 올린 상주문이 330여 조에 이르는 바 선생은 경학, 사학, 문학, 병학, 지리, 의학, 음악, 농법 등 다양한 분야에 폭넓은 관심과 깊이를 갖고 있었다. 그는 중국 요순을 이상적 군주로 떠받들던 시대에 단군을 국조로 받들고, <삼국사기>, <고려사> 등 우리 역사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고유 풍속을 존중, 보존해야 한다고도 했다. 이에 한 역사학자는 선생을 ‘주체성 있는 실학적 성리학자’로 규정한다.

▲지당 이화자 대포서원 원장이 쓴 ‘지족당’ 현판.

 

서적 여러 권 만들어 여러 사고에 보존하라 주장

군비에 대한 관심도 커 “문묘(文廟)는 있으나 무묘(武廟)가 없으니 무묘를 세워 역대 명장을 모시자”고 주장하는 등 무(武)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군정의 여러 가지 결함을 명확하게 지적하는 등 양보다 질에 치중한 군사 의견을 피력했다. 선생의 「비변 10책」이 국방에 관한 근본 방침을 밝힌 것이다. 훈구파였던 그는 세조의 국방정책 조언 등 사리를 똑바로 이해하던 경륜가의 면모를 보여 세조가 그를 제갈량에 비유했다고 전한다.

“눌재 할아버지는 67세에 관직에서 물러난 뒤 네 아들과 함께 대포리에 내려와 지내다 돌아가셨다. 성종은 사당 ‘수안사’를 내려 할아버지를 기렸는데 임금이 내린 불천지위(不遷之位·큰 공훈이 있어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 사당이라 내 아버지, 할아버지도 이곳에서 사당을 돌보며 사셨다. 540여 년의 세월을 간직한 생가를 고치고 고치다 종중에서 2007년부터 계획했던 종가 복원계획을 실행해 작년 새로 한옥으로 지었다. 올 3월에 들어왔다.”

그런데 선생의 신위를 모신 사당과 생가 앞으로는 양촌산업 단지가 형성돼 있다. 선생의 낙향 이후 형성된 남원 양씨 집성촌이 산업단지 개발로 대부분 떠나고 현재 10여 가구 정도만 남았다. 김포향토유적 제10호인 사당은 산업단지에 가려 네비게이션 안내가 아니면 찾아가기 힘들게 됐다.

▲눌재의 신위가 모셔진 사당 전경.
▲사당 내부 모습. 오른쪽에 정조가 <눌재집> 서문에 직접 쓴 글을 넣은 병풍이 있다.

“눌재 할아버지의 가장 큰 업적은 서적 보존을 위해 여러 권을 만들어 여러 사고에 두자고 주장한 것이다. 그 덕분에 임진왜란 때 다른 사고가 다 불타버렸지만 전주사고만 화를 면해 우리가 지금 문서 고증을 통한 역사를 배울 수 있게 됐다. 성종 때 할아버지가 세조, 예종의 실록을 전주사고에 봉안하는 책임을 맡으셨다.”

서적은 당시의 역사와 문화가 담긴 것으로 그 보존은 중대 사명이 아닐 수 없다. 선생이 「서적 12사 상소문」을 통해 보여준 도서의 보존과 간행에 대한 실효성 있는 주장은 그의 역사학자적 면모을 보여주고 있다.

“눌재 할아버지가 편찬을 주도한 <팔도지리지>, <동국지도>, <연변방수도> 등은 전국적으로 새로운 조사를 실시하는 등 자세한 조사와 노력 끝에 나온 조선 초기 지리서의 결산이다. 실제 측량 지도가 없던 당시 매우 큰 공헌이라 할 수 있다. <연변방수도>의 경우 해안 협곡, 물살 등이 자세히 서술돼 있어 이순신 장군이 명랑해전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눌재집> 서문에 정조 직접 쓴 글.

규장각 설립 아이디어 바탕이 눌재... 정조의 정신적 지주

이 밖에도 농지를 개간하고 수리시설을 확충하자는 주장과 전국 각 도, 군, 현에 의료기관을 둬 백성들의 질병을 치료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는 등 백성들의 복지 증진에도 관심이 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선생이 개혁정치를 펼쳤던 정조의 정신적 지주였다는 사실이다.

“정조가 즉위하고 개혁정치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규장각을 세웠다. 정조는 송나라의 제도를 본떠 한 것이지만 300년이나 앞선 세조 9년에 눌재 할아버지가 주장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정조는 할아버지에 대해 궁금해했고 <눌재집>까지 있다는 사실에 간행을 명령하면서 친필로 서문을 써 규장각이 할아버지의 아이디어에 바탕을 뒀음을 분명히 했다. 게다가 규장각에 할아버지의 외손 33명을 기용했다.”

정조는 선생의 공적을 치하하기 위해 서원건립도 명령하나 출생지에 ‘월곡서원’을 창건했을 뿐 말년을 보낸 김포에는 서원건립이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다 1973년 성균관으로부터 건국 제1호인 ‘대포서원’을 인가받아 창건하게 됐다. 대포서원은 김포향토유적 제1호이다.

“눌재 할아버지가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침을 알면 위험하지 않고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뜻을 가진 ‘지족당’을 현판으로 한 만큼 집안 대대로 ‘모든 일에 만족할 줄 알고 과하게 욕심 부리지 말고 살라’는 가르침이 전해지고 있다. 아마도 오랜 공직생활에서 터득한 진리가 아닐까 싶다. 선조의 뜻을 따라 도를 넘는 욕심을 자제하고 화목하게 살아가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

관직을 그만두고 1년 만에 돌아가셔 후학을 양성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는 그는 “후손이 훌륭한 업적과 정신을 남긴 선조를 더 많이 알리지 못해 할아버지가 역사에 묻힌 것 같아 죄스럽다. 이제 눌재사상연구회 등을 통해 선양사업을 활발히 펼치고, 사학자의 연구에도 힘을 보태려 한다”고 했다. 또한 “김포시와 문화원에서도 한쪽으로 치우치기보다는 균형 있게 김포의 얼과 인물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사당에서 내려다본 생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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