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형
안동대학교 (철학)명예교수

세상이 소란하다. 사고도 많고 사건도 많다. 사건들마다 설이 많고, 사건 당사자들의 주장과 억척들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어느 날 아침 지하주차장 주도로를 천천히 빠져나가는데, 갑자기 젊은 운전자가 내 차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그는 조수석에서 우는 딸을 달래다가 앞을 보지 않고 성급하게 운전대를 돌린 것이었다. 황급히 내려 내게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딸내미가 울어서 (전방을) 못 봤습니다.” 나는 일방적으로 박히긴 했으나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때마침 다른 사고 신고를 받고 지하주차장으로 들어 온 경찰차에 신고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편은 오후가 되자 태도를 바꿔 일방적인 실수를 인정치않기 시작하더니 보험사를 통해 사태를 복잡하게 꼬아가기 시작하였다. 결국 상대적으로 약체인 내 보험회사가 힘 있는 상대 보험회사에 끌려다니더니 과실 비율이 6:4로 나왔다고 최근에 전해주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철학자 파스칼은 <팡세>에서 인간은 약하디약한 존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인간이 위대한 것은 거대한 무력을 가지고 인간을 공격하는 자연물보다 자신이 훨씬 나약하다는 사실을 아는 생각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힘은 무력의 행사가 아니라 사태를 제대로 인지한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이다. 다른 동식물들은 자기 존재에 부여된 힘을 도대체 뭔지도 모르고 그저 행사하기만 한다. 반면에 인간은 모든 사물의 상황을 파악하여, 자기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 파악은 결국 인간 자신의 한계 상황의 파악이다. 
독일 철학자 야스퍼스에 따르면 인간 존재는 바로 한계 상황에 직면한 실존이다. 우리는 다양한 한계에 마주쳐 살고 있다. 하루에 천 킬로미터를 걸어갈 수 없고, 종일 일만 할 수 없으며, 세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없다. 두 장소에 같은 시간에 있을 수 없고, 200세 생일잔치를 할 수 없다. 동시에 희극과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도 없다.

한 입으로 두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고, 80세의 여성이 출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게 헤아리다 보면 우리는 사방이 한계로 겹겹이 싸여 있음을 알게 된다. 좀 더 자세히 관찰해보면 심지어 인간 사이에도 능력과 기능과 관심에 따라 이 한계 상황은 다르게 펼쳐진다. 

야스퍼스는 우리가 한계 상황에 정직하게 부딪히면 우리는 모두 좌절하게 된다. 이 좌절은 내가 의기소침해져서 하던 일을 포기하는 심리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좌절을 통해 인간은 나약한 자신의 근원적인 모습을 철저히 깨닫는다. 동시에 우리는 좌절을 통해 이제는 겸손해지는 모습을 결과적으로 갖는다. 이런 인간의 실존을 철학자 키에르케고어는 신 앞에 선 ‘벌거벗은’ 단독자라고 묘사한다. 신 앞의 단독자는 좌절과 겸손을 통해 정직을 획득한다.

정직하고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인정하고 수용하고 소중히 여기며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기꺼이 내주며 그의 의견을 경청하여 공감하는 동시에, 공동선을 도모한다. 겸손한 사람의 관심은 다른 사람의 견해가 나와 얼마나 다른가를 부정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그 다름을 나의 성숙의 계기로 삼아 기꺼이 수용한다.

이때 그들의 다름은 갈등의 걸림돌이 아니라 다양성과 상호발전의 디딤돌로 사용된다. 이런 작동원리의 기저에는 사랑과 미움의 선택이 자리하고 있다. 많은 사상가는 사랑은 구성원들을 뭉치게 하고, 미움은 흩어지게 한다고 오래전부터 믿어왔다. 이런 면에서 ‘이념의 성취란 정당한 분노가 필요하다’라는 주장은 속임수이다.

이제 우리 사회가 성숙한 공동체로 바뀌려면 회복해야 할 것이 있다. 우선 시끄러움을 잠재울 차분한 생각의 일상화이다. 생각을 가다듬으면 우리의 한계가 감지될 것이다. 한계를 정확하게 깨달으면 좌절의 이해에 도달한다. 또 건강한 좌절은 우리를 겸손으로 이끈다.

겸손하면 정직을 회복하여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알아 다른 사람과 공동선을 도모하게 되기 때문이다. 공동선의 목표를 세우고 서로 협력하면, 서로를 위하여 해를 끼치는 무례한 일은 하지 않을 테고, 그러면 결국 시끄러움은 사라질 것이다. 우리 사회가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공동체가 머지않아 도래하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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