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필시인
(사)한국문인협회
김포지부 사무국장

시간을 거슬러 아주 어릴 적 가난하고 배고픈 시절에 누가 만들어냈는지도 모르는 무서운 이야기가 나돌았다. 손이 뭉그러진 문둥이들이 무리를 지어 문전걸식을 하며 어린아이의 간을 먹으면 문둥병이 낫는다는 괴소문이 떠돌던 시절이다.

정월 대보름날, 어머니가 고수레 음식을 대문 밖에 내다 놓으면 문둥이 같기도 한 사람들이 찾아와 밥과 나물을 받을 때 구부정하게 손가락을 감추듯이 두 손을 양재기에 감싸고 서 있는 모습을 보고 겁에 질려 숨은 기억이 있다.

그렇게 시간이 한참이나 흘러 사회생활을 시작할 즈음에 <가도 가도 황톳길> 보리피리의 시인 한하운 「그 슬픈 생애와 詩」, 그 두려움의 대상인 문둥이 시인의 시를 접하고 가슴을 찌르는 충격을 받았다. 시를 공부한 적도 없는 젊은 시절 기억 저편, 그 때 읽은 <전라도 길>이 너무도 깊이 각인돼 있어 한참이나 유년의 마음속에 자리 잡아 떠나지 않던 문둥이의 두려운 기억과 함께 한하운 시인을 만났다. 

소록도에 가면 한하운 시인의 대표시 <보리피리>가 큰 돌에 새겨져 있다. 이 돌은 원래 근처 득량도라는 섬에 있던 돌인데 일제 강점기 때 이 섬에 일본인들이 ‘천국 가꾸기 사업’을 벌인다고 나환자 6,000명을 동원해서 소록도까지 옮겨 놓았다고 한다.

돌의 무게가 엄청나게 무거워 나환자들의 뭉그러진 손으로 땅을 파고 길을 내고 또 이 돌을 나르면서 돌의 무게에 깔려 죽고 또 일본인들에게 맞아 죽은 나환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모르지만 5.16이후 한하운의 대표 시 <보리피리>를 새겨 넣은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30년이라는 긴 시간을 훌쩍 넘기고 김포와 인연이 되어 그동안 잊혀진 <가도 가도 황톳길>과 자연스럽게 재회를 하게 됐다. 한하운 시인 길 장릉공원 시인의 묘소를 몇 번 가보고 재회의 기쁨보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앞서고 가슴이 아려오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아무도 반기는 사람 없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날아 고향땅 가장 가까운 곳에 묻혔건만 시인 자신이 체험한 천형(天刑)의 비통함을 시로써 승화시킨 시인의 파랑새는 바로 앞 장례식장과 판넬로 지은 공장 건물들의 부조화로 현재의 주변 환경도 생전의 시인의 슬픔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것 같았다.

김포 땅 이 작은 장릉 공원묘지에서 아직도 문드러진 숨 가쁜 시인의 가슴을 안고 그리운 고향 하늘이 잘 보이는 곳으로 날 수는 없을까? 1975년에 영면에 들어 46년이 흐르고서야 한하운 시 속에 있는 말처럼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을 아름다운 보리피리 ‘꽃 청산’으로 이제는 한하운 묘소가 있는 김포에 우리가 만들어 주고 싶다.

            <구성 : (사)한국문인협회 김포지부 고문 이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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