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로 달라진 세상, 미디어를 어떻게 활용해야하는지에 대한 고찰

스마트폰 중독. 전자기기가 보편화된 요새 어디서든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말 그대로 스마트폰 중독이 만연한 요즘, 그 문제가 심각하다. 보행자들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위태롭게 걷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고, 심지어는 스마트폰을 조작하며 운전하는 운전자들도 있다.

학교에서는 의례적으로 학생들의 스마트폰을 걷어가고 하교 후 학부모들은 어플을 이용해 자녀의 사용을 통제한다. 식당에서는 젊은 부부가 아직 말도 못 뗀 아기 손에 스마트폰을 쥐여 주고 여유롭게 식사한다. 주변을 전혀 둘러보지 않은 채. 그렇게 멀쩡히 길을 걷다가 가로수에 부딪히고, 차를 들이받고, 핸드폰에서 나오는 영상 소음에 인상을 찌푸리는 다른 손님을 알지 못한다.

동방예의지국. 어느 새부턴가 나는 동의하지 못한다. 심하게 흔들리는 버스 안에 서 있는 허리 굽은 꼬부랑 할머니 앞에는 이어폰을 귓구멍 깊숙이 꽂은 젊은이가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다.

“나 임신했을 때가 생각나네.” 하며 임산부에게 곧잘 자리를 양보해주던 아주머니들도 연신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다. 그 옆에서 불룩하게 튀어나온 배를 감싼 채 초조해하는 임산부는 보지 못한 채. 건강하고, 앞으로의 건강을 위해서 등산복을 멋지게 차려입고 산행을 다녀오는 아저씨도 뭐가 그리 심각한지 바로 앞에 목발을 짚은 환자도 못 보고 스마트폰만 하염없이 바라본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보며 ‘말세’라며 혀를 차던 어르신은 곧 무안함에 창밖만 바라보신다. 모두 스마트폰에 빠져 있느라 어르신의 말씀을 들어줄 이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아이를 그렇게 키우지 않겠다며 절대로 스마트폰을 쥐여 주지 않았다. 즐거워야 할 가족 외식에 나와 남편은 아이를 교대로 보기 위해 허겁지겁 입에 음식을 쑤셔 넣었고 어쩌다 아이 친구 가족들과 식사를 하면 별난 엄마 취급받기 일쑤였다. ‘왜 저만 스마트폰 못 보게 해요?’라며 울상을 짓는 아이에게는 ‘모두 너를 위해서’라며 단호하게 대했다. 아이가 가정에 있는 시간에는 미디어를 접하지 않도록 다른 장난감으로 가능한 한 주의를 돌렸다. 그리고는 나의 교육 철학만이 옳다며 스스로 만족했다.

그런데 세상이 변했다. 통지표는 교육청 어플을 통해 스마트폰이나 PC에서 열람할 수 있고, 아이 수업은 모두 온라인으로 전환 됐다. 전자기기에 능숙한 아이들은 손쉽게 많은 정보를 접하고, 멀리하던 아이들은 온라인 수업에 제대로 참여하는 것조차 어려워한다.

나의 교육관 또한 코로나로 인해 허무하게 무너졌다. 온종일 집에만 있느라 짜증이 난 아이에게 절로 리모컨을 쥐여 주고 스마트폰을 건넸다. 주변 엄마들은 혹여나 우리 애가 뒤쳐질까 싶어 코딩학원을 알아보고, 디지털 기기에 익숙하지 않은 어르신들은 컴퓨터 교육을 찾아 나선다. 바야흐로 ‘언택트 시대’에 도래한 것이다. 이제 누군가와 대면한다는 것은 공포로 다가왔다.

버스와 지하철에는 침묵만이 맴돈다. 오늘 장에 어떤 물건이 실한지, 나는 어디서 뭘 하던 사람인데 오늘 왜 나오게 되었는지 정겹게 담소를 나누던 어르신들은 각자의 짐을 끌어안은 채 앞만 바라보고 있다. 행여나 누가 살갑게 인사를 건네고 길이라도 물을라치면 경계와 의심의 눈초리가 앞선다. 어떤 이들은 아예 그 자리를 피해 버린다. 같은 동 주민과 반갑게 인사 나누던 엘리베이터에는 이제 누군가 타고 있으면 불편하다. 그저 눈만 굴리며 목적이 있는 층에 도달하기만을 기다린다.

음식이 나오기 전 먼저 나온 밑반찬을 맛보며 “이 집 김치가 맛있네.” 하던 사람들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음식이 나올 때까지 마스크를 내리지 않는다. 그리고 이 모든 어색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점점 더 스마트폰에 몰두한다. 그것들을 경멸하던 나도 대중교통을 타면,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면, 식당에 가서 음식을 기다리게 되면 스마트폰을 꺼내 든다. 그렇지 않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런 나를 이상하게, 혹은 말이라도 걸라 두렵게 바라보는 시선들이 매서웠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저녁을 먹으며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나누며 대화한다.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자 더욱 노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몇 달 만에 유치원에 다녀온 아이가 나와 남편에게 말했다. “식사시간에 얘기하지 않아요. 마스크 내리고서는 절대로 말하지 않아요.” 방역과 위생수칙을 철저하게 지킨다더니, 여섯 살짜리 내 아이에게도 단단히 일러줬나 보다.

“가족끼리는 괜찮아.”라며 대화를 이어나가던 나조차도 혼란스러워진다. 가족 간의 감염 방지를 위해서 가정에서도 침묵을 유지하는 게 맞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던 나는 이제 컴퓨터 앞에서 강의하게 되었고, 우리 아이 또한 미리 잘 배워두라며 유아 코딩 컴퓨터를 사주었다. 확진자 수, 미세먼지, 동선 정보 그리고 그로 인해 문 닫은 가게가 어딘지, 어디서 배달이 가능한지 찾기 위해 틈만 나면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남편에게 퇴근길에 하나씩 사 오라던 생필품은 모두 인터넷 주문한다. 그렇게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다 보니 오랜 지인과 안부도, 소통도, 급한 서류도,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여가에 관한 정보도, 지난 방송도 스마트폰으로 해결한다. 나라에서 지급하는 혜택도 스마트폰으로 받는다.

나는 이제 스마트폰 없이는 살 수가 없다. 잘만 이용하면 나쁘지 않으리라던 나의 다짐과는 달리 홀리듯 빠져들었다. 아이가 자꾸 TV를 보여달라고, 스마트폰 잠금을 해제해달라고 떼쓰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새로운 정보가 넘쳐나는 그 세계를 경험해보니 일상은 시시해졌고, 무뚝뚝한 남편, 아직 어린아이와 대화하는 것보다 맘카페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얘기하는 것이 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현실보다 스마트폰 속 세계에 더 이입하게 되었다. “엄마는 맨날 휴대폰만 들여다봐. 나 심심한데.” 어느 날 딸아이가 한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엄마 일해야 한다며 틀어 준 유튜브에서는 폭력적인 장면이 요란하게 재생되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이는 익숙한 듯 감흥 없이 바라본다. 놀란 나는 그제야 아이를 챙기기 시작했고, 엄마가 같이 놀아주길 기다리던 아이는 오랜만에 즐거운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러나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시시한 듯 도로 TV 앞으로 향했다. 간만에 다정한 말을 건넨 내게 남편은 별다른 대꾸 없이 스마트폰만 들여다보았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시작은 나의 스마트폰 중독이리라. 그걸 뒤늦게 깨달은 나는 그날부로 정말 필요한 몇 개의 어플을 빼고는 싹 다 지웠다. 그리고 다시 가족과 소통하려 애썼다. 무던한 노력 끝에 우리 가족은 다시 대화를 되찾았다. 잠깐 맛봤던 자극적인 즐거움이 나와 내 가족을 몇 번이고 유혹했지만, 시간과 정성을 써 가며 열심히 막아 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의도적으로 스마트폰을 멀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렇지만 전자기기로부터의 완전한 단절은 몹시 어렵다. 생활에 있어 ‘필수 불가결’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없이도 잘 살던 시대는 이제 완전히 끝이 났다.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다만 그것을 얼마나 받아들이고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때가 아닐까 싶다. 직접 겪어 본 스마트폰 중독은 너무나도 쉽고 가깝고 빠르다. 잠깐 한눈을 팔면 어느새 자극적인 세계에 들어와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다.

어른이 된 나는 어느 정도 중독을 막고자 함이 가능하겠지만, 아직 어린 우리 아이를 비롯한 다음 세대가 걱정이다. 이러한 시국에 무엇보다도 부모의 관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필요할 땐 사용하지만, 불필요할 땐 언제고 끊을 수 있도록 아이에게 자주 상기시키고 이외의 시간은 내 한 몸 던져 아이와 최대한 놀아주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싶다.

또한, 자극적인 콘텐츠의 유해성과 위험성을 인지하고 불매하기를 바란다. 수요가 없으면 공급 또한 없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이러한 노력과 더불어 정부 차원에서 지속적인 법적 규제와 교육용 콘텐츠 개발이 필요하다. 어린이 혹은 심약자가 접하는 경로에 놓인 모든 콘텐츠를 철저히 검열하고 걸러 내야 한다. 우리 모두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부모로서, 미래 세대의 선대로서 철저히 노력해야만 한다.

지금도 손에 들고 있는 스마트폰을 내려두고 잠시 우리 아이들을 바라보자. 완전하게 ‘필수 불가결’해진 스마트폰의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되고자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해야 하는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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