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파랑새>

박수영 딥인더북 독서모임 회원

벨기에 극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파랑새>는 1911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다.

가난한 나무꾼의 아이들 치르치르와 미치르는 크리스마스 전날 늦게까지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앞집에서는 파티가 열리고 맛있는 음식과 멋진 장난감들이 가득한데 남매의 집에는 크리스마스 장식 하나 없이 초라했다.

오빠인 치르치르가 “저 사람들은 참 좋겠다”하고 한숨을 내쉬는 순간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고 초록색 옷에 빨간 두건을 쓴 할머니가 들어왔다. “난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파랑새를 찾으러 왔단다. 너희 집에 혹시 파랑새가 있니?”하고 묻자 아이들은 대답한다. “새가 있긴 하지만 파랑새는 아니에요”

할머니는 손녀가 몹쓸 병에 걸렸는데 할머니 대신 파랑새를 찾으러 가 주겠냐고 묻자 남매는 그러겠노라고 약속한다. 할머니에게 건네받은 요술모자를 쓰니 평범한 집 안의 풍경이 달리 보였다. 물과 불의 요정, 빵과 우유의 요정, 개와 고양이의 요정을 보며 사소한 것이라도 함부로 다루면 안 되겠다고 남매는 생각했다. 모자에 달린 다이아몬드를 돌리니 다른 세계가 열렸다.

죽은 사람들이 사는 추억의 나라, 밤의 여왕이 다스리는 밤의 궁전을 지나 흉측한 괴물들이 사치요정과 부자요정, 겉치장요정의 모습으로 사는 행복의 궁전을 지나며 파랑새를 찾았지만 새들은 궁전을 나오면 다 죽어버렸다. 궁전 밖에는 남매의 집에 머무르는 튼튼한 몸의 행복, 사랑의 행복, 떼쓰는 행복의 요정들이 남매를 반겼고 저 멀리서 엄마의 행복요정이 아이들을 따뜻하게 맞아주고 있었다.

남매는 행복도 잠시, 파랑새를 찾으러 미래의 궁전으로 갔다. 그곳은 온통 파란빛이 감도는 곳이었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파란빛의 아이들이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오래 살 수 있는 약, 달에서 보물을 찾는 기계, 엄청 큰 과일 등 태어날 때 가져갈 행복의 선물들이었다. 그곳에 있던 파랑새 한 마리를 잡는 순간 치르치르와 미치르는 노란빛이 새어 나오는 작은 창문으로 빨려 들어가고 남매는 잠에서 깼다.

일어나니 새장 속에는 파랑새가 있었고 옆집 할머니가 마침 문을 두드렸다. 아픈 손녀가 파랑새를 보면 기운을 차릴 것 같다는 말에 아이들은 망설임 없이 파랑새를 건넨다.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절대 변하지 않는 파랑새가 있기 때문이다.

‘파란나라를 보았니? 꿈과 사랑이 가득한~ 나 치르치르의 파랑새를 알아요~’ 유명가수가 불렀던 ‘파란나라’는 학창시절 운동회 때 많이 들었던 노래다. 노랫말 가사처럼 파란나라는 아무리 봐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다. 누구나 한 번 가보고 싶어서 생각만 하는 나라. 그렇지만 아빠의 꿈속에 엄마의 눈 속에는 언제나 있는 나라이다.

떼쓰는 행복 요정은 우리 집에도 있다. 참으로 놀랍다. 떼를 쓰는데 행복이라니? 그 아이도 요정이라고? 순딩이들만 키운 엄마들은 떼쓰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의 고충을 알 리 없다. 한때는 우리 집 떼쓰는 행복요정을 정상궤도에 올려보겠다고 무던히 노력했다. 결과는 엄마도 힘들고 아이도 힘들 뿐 아니라 정상궤도엔 진입조차 못했다.

앞의 문장에서 보듯이 문제는 그 아이를 비정상으로 보는 나의 시선에 있었다. 그 아이 덕분에 나의 정상궤도의 범위가 무한 늘어났다. 행복은 엄마의 눈 속에 있는 것인데 난 그때 떼쓰는 행복이가 날 너무 힘들게 한다는 이유로 미워했다. 내가 아이를 바라보는 그 눈에 사랑이 가득하면 그게 곧 행복인 것을 그때는 몰랐다.

혹시 아직 내 눈에서 못 찾은 엄마들이 있다면 아빠의 꿈속을 한 번 뒤적거려 보는 것도 좋겠다. 그리고 노래 마지막 구절처럼 아이들 손에 행복을 쥐어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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