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큼              문정영 

비 그치고 돌멩이 들어내자
돌멩이 생김새만 한 마른자리가 생긴다
내가 서 있던 자리에는 내 발 크기가 비어 있다
내가 크다고 생각했는데 내 키는 다 젖었고
걸어온 자리만큼 말라가고 있다
누가 나를 순하다 하나 그것은 거친 것들 다 젖은 후
마른 자국만 본 것이다
후박나무 잎은 후박나무 잎만큼 젖고
양귀비 꽃은 양귀비 꽃만큼 젖어서 후생이 생겨난다
여름비는 풍성하여 다 적실 것 같은데
누운 자리를 남긴다
그것이 살아가는 자리이고
다시 살아도 꼭 그만큼은 빈다
그 크기가 무덤보다 작아서 비에 젖어 파랗다
더 크게 걸어도
더 많이 걸어도
꼭 그만큼 이라는데
앞서 빠르게 걸어온 자리가
그대에게 먼저 젖는다

시 감상

그만큼이라는 거리를 생각해 본다. 어쩌면 그 거리는 중용의 말씀 같기도 하고, 분수를 알라는 말 같기도 하고, 요즘처럼 만족할 수 없는 삶에 대한 ‘만족’의 새로운 정의 같기도 하다. 세상을 조금 살아보니 알겠다. 
그만큼이라는 거리를 유지하고 산다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더 많이 걸어도, 더 크게 걸어도 결국 꼭 그만큼이라는 지근의 거리.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거리다. 
상대와의 거리 그리고 나와 나의 거리는 포장이라는 돌멩이를 들어내면 환하게 보인다. 신축년 한 해, 꼭 그만큼을 기억하고 살자. 가장 평온한 삶이 될 듯하다.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프로필]
 문정영 : 전남 장흥, 건국대 영문학, 시산맥 발행인, 
 시집(꽃들의 이별법)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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