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형
안동대학교
(철학)명예교수

10월에 태어난 위대한 서양철학자로 독일의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15일)와 미국의 존 듀이John Dewey(20일)가 있다. 니체는 철학자 중의 철학자로 추앙받고 있지만, 존 듀이는 교육학자로만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그런데 오늘날 전 세계를 제패하는 거대한 미국의 바탕인 실용주의 철학을 완성시킨 철학자가 듀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미국을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미국을 떠받치는 사상은 실용주의이다. 실용주의 철학은 프라그마티즘이라고도 불리는데, 19세기 후반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신사조로서 ‘진리란 써서 결과적으로 드러날 때 검증된다.’는 가치관을 갖고 있다. 이런 태도는 철저히 경험주의, 도구주의를 함축한다. 실용주의는 철학의 기초를 구체적 경험에 두고 있으므로, 순수이념주의와는 반대되는 입장을 취한다. 실용주의 철학은 퍼스C. S. Peirce(1839-1914)에서 시작해서 제임스W. James(1842-1910)를 거쳐 듀이(1859-1952)에 와서 완성이 된다.

실용주의 철학의 시조인 퍼스는 독일철학자 칸트(1724-1804)의 실천이성을 앞세우는 사상에서 영향을 받아 실천적 행위의 우월성을 주장했다. 경험의 결과가 순수한 사고보다도 더 근본적이라고 보았다. 제임스도 원리, 범주, 필연성 등과 같은 근본개념보다도 결과, 성과, 사실 등에 치중해야 한다는 실용주의 태도를 옹호했다. 진리도 실험이나 실천을 통해 검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임스의 사상을 그대로 이은 듀이는 실용주의적 진리란 관념을 활용하는 능력이라고 외쳤다. 나아가 듀이는 퍼스와 제임스의 이론화의 수준을 뛰어 넘어, 윤리, 교육, 예술 및 정치 분야로까지 실용주의를 광범위하게 관철시키는 역량을 발휘하였다.

듀이는 실용주의를 도구주의, 실험주의로 발전시켰다. 과학과 마찬가지로 사고 혹은 정신활동의 과정을 진리탐구의 시행착오 과정이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이전의 철학사조와 전혀 다른 생각이다. 이전의 철학은 진리를 미리 설계해 놓고 이를 절대적 참이라고 규정하였다. 한 마디로 어떤 사실도 미리 마련된 틀에 맞아야 참이 되었다. 그러나 실용주의에서 참이란 마지막 절차로서 그 효용성으로 판정된다. 말하자면 절대적 참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참이라고 설정된 진리란 임시방편인 도구일 뿐이다. 효용성은 탐구자에게 최대로 유리한 목표에 접근된 목표치의 도달이다. 이것은 미국의 기본적인 진리관이다. 말하자면, 국가적 차원에서 볼 때 최대의 진리는 미국의 국익에 최대로 접근된 성취이다. 이것을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미국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 주장은 과학주의로부터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듀이는 본인이 미국의 개척시대에 태어나 존스 홉킨스, 시카고, 컬럼비아 대학의 교수직을 역임하면서, 훌륭한 지도자로서 미국과 전 세계를 자유, 평등, 행복을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 체계로 개조시키는데 현저한 역할을 했다. 그는 특히 보편적 교육학설을 세워 세계 사상계에 공헌을 했고, 신생 미국의 새로운 교육발전 모델을 세계에 전파하는 지도적 역할을 했다. 많은 나라에서 통용되는 도서정리의 한 방법인 듀이의 10진 분류법이 그 중 하나이다. 그는 몸소 중국, 터키, 멕시코, 소련 등을 방문하여 철학과 교육학을 직접 지도하기도 했다.

듀이의 실용주의 철학은 구태의연한 개념적 용어 풀이를 떠나, 시민의 경험으로부터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콘텐츠를 취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실천에 무게를 두었다. 이를 위해 철학은 과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과 협업하여 구체적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모든 성과를 활용하도록 개방적으로 실험을 시도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사회의 개조를 위해 열린 토론과 대담을 제안함으로써 전체주의와는 다른 자유민주주의를 열렬히 옹호한 실천적 철학자였다.

많은 이념과 논쟁을 자기 집단의 이익추구를 위한 도구로 남용하는 이 시대, 진정한 소통을 외면한 채 일방통행적 선포만이 난무하는 답답한 한국의 상황이, 자유로운 소통으로 사회개조를 주창한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를 생각나게 한다. 지금보다도 훨씬 복잡하고도 궁핍했던 세계 사회를 새로운 사회로 진척시킨 미국의 실용주의를 듀이를 통해 다시 음미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현실을 도구적으로 바라보는 여유가 이념적 긴장을 풀고 현안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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