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통 속의 커터 칼을 보면 ‘진’이라는 아이가 떠오른다.

여자 화장실,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진이와 실랑이를 하는 중에, 몰려든 아이들을 먼저 수습해서 돌려보내고 나면 그제서야 피가 스며있는 손목을 가린채 복도로 걸어나오는 모습이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처음엔 당황했고, 두 번째는 눈물이 났고, 세 번째는 괜찮다고 안아주었다. 그렇게 반복적인 충격을 받다보니 그 마저도 적응이 되었는지, 몇 번인지 세지도 않게 된 때에는 무덤덤하게 손목에 약을 발라주는 교사가 돼 있었다.

진을 만나기 2년 전에, 진의 오빠인 준홍이 담임을 했다. 해마다 학년 초에 받아보는 학생이해자료를 보고 준홍에게 정신지체 3급인 홀어머니와 연년생 여동생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이 없었고 미술을 좋아하지만 형편이 어려워 학원은 다니지 못한다고 쓰여 있었다. 그 A4 용지 한 장을 읽은 날 저녁, 녹록하지 않은 중1 아이의 무거운 삶을 생각하며 한숨과 눈물이 뒤엉켰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꿋꿋하게 생활하는 준홍은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고 학업에도 최선을 다하는 학생이었다. 학급 회장으로 뽑힌 준홍이 때문에 3월에 있는 학부모 총회에서 어머니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정신지체 3급이라는 정보와는 달리, 어머니는 전혀 불편함이 없이 오히려 무척 활달하고 멋을 많이 내서 화려한 인상을 받았다.

대화를 나눠보니 조울증이 심해서 약 처방을 오래 받아왔고, 그 의사를 통해 증명서를 발급받아 읍사무소에 정신지체 3급으로 등록한 뒤 생활비 지원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된 것과 지능이 떨어져서 아이들을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조울증으로 치료 받고 있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2년 후, 진의 담임이 되고 나서 생각했다.

“불행 중 다행이 아니었구나, 그저 불행의 연속일 뿐이구나.”

습관적으로 자해를 하는 진이도 오빠와 마찬가지로 삶에 대한 애착과 급우들 사이에서 리더십이 있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인지도가 높았기 때문에 학급 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총무까지 같이했다. 자해를 하지 않는 시간에 친구들 뿐 아니라 나와도 매우 친했고 소외되는 친구가 있으면 특유의 유쾌함으로 먼저 손을 내밀어 돕기를 즐겨했다.

“진아, 홍익인간 같아. 그 어려운 것을 네가 하는 구나.”라고 말을 걸면.

“샘~, 저만 믿으시면 되요. 알죠?”하고 찡긋 답을 했다.

학부모 총회에서 어머니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더 짙어진 화장과 허스키해진 목소리였지만 활달한 모습은 여전했고, 반가운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남자친구가 생겨 동거를 하고 있으며 아이들은 아빠라고 부르며 잘 따른다, 호프집을 운영하는 본인 대신 준홍과 진의 저녁식사 뿐 아니라 아침 등교도 봐주고 있다고 했다. 입에서 술 냄새가 나서 죄송하다, 새벽까지 장사를 하다 보니 이럴 때가 있다는 대화가 오고갔다.

진이 자해하는 것을 세 번 정도 말렸던 즈음, 5월의 연이은 행사들이 아이들을 설레게 할 때 였다. 오늘 급식 메뉴보다 반티를 무엇으로 정할지가 며칠 동안 뜨거운 감자였다.

진이도 즐거워 보였다. 부회장 겸 총무로서 아이들 한명 한명에게 반티에 새길 개인별 이니셜을 명렬표에 받아 적고 그에 맞는 반티 값을 걷고 있었다. 꼼꼼하게 임무를 잘 완수한 진이 덕분에 행사 전에 반티가 무사히 도착했고 체육대회, 소풍 등 학교 행사들 뿐 아니라 학급 단합대회도 즐겁게 마쳤다.

그렇게 5월의 열기가 식고 6월 말이 되었을 때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반티 값 입금이 안됐다는 것이었다. 중2의 아이에게 입금을 맡겼던 내 잘못이 컸다. 최악의 경우 54만원을 메꾸겠구나 싶었다. 핸드폰으로 진에게 전화를 했더니 진의 어머니가 받았다. 너무나 밝게 안부를 묻는 그녀에게 사라진 반티 값을 말할 수 없었고, 진의 말을 먼저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밤이 되어서야 진에게 전화가 왔다. 반티 값을 몽땅 잃어버렸다는 것이었다. 당황스러웠지만 진과 내가 해결할 수 밖에 없었다. 직접 어머니께 말씀드리라고 했고, 다음날 어머니와 다시 통화를 했다. 1/3은 잃어버렸고, 어차피 금액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나머지 2/3는 여기저기 써버렸다는 진의 고백을 전해주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배신감이 컸지만, 아이가 반성하는 모습을 보며 궁지로 몰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진의 경제적 책임에 담임의 도의적 책임을 보태 그 사건은 우리 둘이 조용히 마무리했다.

그 이후로 가출, 흡연, 음주, 폭행 등의 사건이 이어졌다. 아침이 되어 학생부에서 문제 삼을 것을 알게 된 전날 밤이면 어김없이 진에게 전화가 왔다.

자해를 지켜보는 것과 비슷했다. 처음엔 당황했고, 두 번째엔 더 큰일이 나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했고, 세 번 째엔 담임을 믿고 먼저 말해주는 것이 고마웠다.

하지만 이 또한 거듭되다보니 무덤덤하기를 넘어서 지치는 마음이 들었다. 담임의 약한 마음을 무기삼아 휘두르다가, 일이 커지면 방패막이로까지 이용하는 것 같아서였다.

2학기가 되자 무단으로 등교하지 않는 경우도 잦아졌다. 걱정 반 괘씸함 반의 마음으로 전화를 하면 어김없이 수화기 너머 진이 대답한다. “선생님, 병원에 가서 조울증 약 처방 받아 가고 있어요. 애들한테는 비밀로 해주세요.”

“처방전은 받았지? 그거 선생님 꼭 보여줘야 한다.”

“아뇨. 엄마가 잘 아는 의사 선생님이라 학생 때부터 정신과 치료 받았다는 기록 남으면 안 좋다고 약 그냥 주셨어요.”

“그렇구나···.”

확인했어야 했을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진의 어머니는 진의 말이 맞다는 확인 문자를 보내왔고, 진은 나에게 약을 증거품처럼 보여주기도 했다. 사실은 더 깊이 캐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 솔직한 마음이었다. 진의 가족을 측은해하기 보다는 내 이성의 잣대로 가위질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진이 다가오면 안아주고, 멀어지면 지켜보고, 사고를 치면 타이르며 1년이 지났다. 복도를 지나다가 3학년이 된 진을 보면 애틋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처음처럼 아프지는 않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진은 결국 학교를 그만뒀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검정고시를 치룬 뒤, 동년배 다른 친구들보다 먼저 대학생이 되었다. SNS를 통해서 짙은 화장과 노란 머리의 진이 사진을 보았다.

지금 떠올려보면, 자해행동은 중3이 되면서 없어졌던 것 같다. 그 당시 중3 진의 담임교사는 진의 자해행동으로 힘들어하는 것을 볼 수 없었다. 진이 나와 함께 지낸 시절, 정말 죽고 싶었다기보다는 관심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생각된다. 그리고 조증과 우울증의 사이 어디쯤에서 인가 현실에 대한 분노를 표출한 것이라고도 생각된다.

진은 격투기를 하고 싶어 했다. 고등학생이 되어 미대를 지망하는 진의 오빠는 어려운 형편에도 비싼 미술 학원을 다니며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에 비해 격투기는 여자아이가 할 것이 아니라며 어머니도 오빠도 진의 꿈을 반대하는 것에 화가 나있던 즈음 나를 만났던 것이다.

필통 속 커터 칼을 보면 요즘도 문득 자해행동을 하던 진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어 마음속으로 꿈을 꾸어본다. 유전적인 조울증인지 현실에 대한 원망인지 아직도 난 잘 모르겠지만, 진의 마음 속 칼날이 자신과 사회를 향하지 않길.

오래 전 그날 “진아, 홍익인간 같아. 그 어려운 것을 네가 하는 구나.”

“샘~, 저만 믿으시면 되요. 알죠?”라고 유쾌하게 주고받았던 대화처럼, 진의 삶에 대한 애착과 주변 사람을 이끌어가는 리더십이 자신과 사회에 이롭게 쓰이기를.

그래서 방향 없는 원망으로 주저앉지 말고, 진이의 뛰어난 재능이 저절로 드러나 사회에 유익한 사람이 되길 기도한다. 아무리 감추어도 끝이 뾰족해 밖으로 튀어나오는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저작권자 © 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