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필사본

김왕노

젊은 날 친구 현우와 새벽녘까지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와 마루 끝에 빈 병처럼 앉아 고개 주억거릴 때
너는 아버지를 속이지 못한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영락 아버지를 쏙 빼닮았다는 나는 아버지의 후속편
아버지가 이 세상에 쓰고 간 필사본 한 권인 것이다
살고 살다가 삶이 서럽다 못한 분서갱유의 날에
나 한 권의 필사본으로 활활 분신하고 싶은데
하나 나는 나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아버지가 남긴 역작

펼쳐진 나를 읽고 가는 숱한 바람과 빗방울
내 행간 행간에 스며드는 햇살과 구름과 목탁 소리
갈피로 스며들어 오래 머물고 가는 꽃 한 철

나는 그들의 베스트셀러
나는 그들이 서로에게 권하는 필독서 한 권인 것이다

[프로필] 김왕노 : 경북 포항, 지리산 문학상외 다수, 시집[말달리자 아버지]외 다수


시 감상
나이가 든다는 것은 닮는다는 말이다. 싫거나 좋거나 어쩔 수 없이 목소리와 외양과 삶의 방식이 판박이가 된다는 말이다. 나는 계보에서 영원히 자유롭고 싶었고 독불장군이고 싶었으나 결국, 계보 속의 다만 다른 하나가 되었다. 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또 그 위 아버지의 아버지라는 계보는 정직하게 기록된 삶의 푸른 문장이었다. 닮고 닮은 우리들이 서로 닮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이다 퇴주잔에 담긴 맑은 소주를 음복하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각자의 필사본인 것이다.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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