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비가 자주 내린다. 내려도 거의 매일 내리는데다 게릴라처럼 불시에 공습하여 마스크 한 장뿐인 나는 금세 포로가 되고 만다. 세상에 이런 비는 생전 처음 본다는 말이 종종 들려온다. 통진 시인의 마을에 갇혀 물끄러미 창밖의 비오는 풍경을 내다본다. 그런데 저기 비를 맞으며누군가 우리 집으로 걸어오는 게 아닌가.
물소 이마에 칼 같은 눈썹, 초록빛 눈동자에 흰 귀를 지닌 그는 스물아홉 살의 초정(楚亭) 박제가였다. 초정이라는 호는 그가 즐겨 읽던 『초사(楚辭)』에서 따 온 것으로 나라를 걱정하면서도 뜻을 펴지 못했던 굴원의 울분이 담겨 있다.
박제가는 평탄치 못한 자신의 삶을 굴원의 삶에 비유한 것이다. 고고한 사람만을 가려서 가까이 지내고, 권세 있는 사람은 더 멀리한다는 그가 갑자기 왜 찾아왔을까? 시인은 순결하고 정직하여 세상과 맞는 경우가 드물고 고명한 일에만 마음을 두어 세상 일에는 무심하며 아득한 세계에 침잠하는 공통점이 있다는 짐작으로 찾아온 것이라면 나는 부끄럽게도 그를 맞아 줄 수 없다. 나같은 삼류시인은 고급 독자보다 더 나을 게 별반 없는데 내가 어찌 그에게 따숩게 화답해 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최고 친구는 자신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지음, 지기, 동심우에 해당하는 친구로 개혁 성향이 비슷하다는 점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그만 문을 열어주고 말았으니, 그는 의관을 편하게 벗어놓고 앉아 북학의의 첫 장을 펼쳐서 보여준다.
“나는 일찍부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과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인간됨을 그리워하여 세대는 다르지만 그분들이 타는 말고삐를 잡고 싶은 소원을 항상 품고 있었다.”라고 쓰고 있다. 얼마나 존경했기에 그분들의 말고삐를 잡는 마부가 되고 싶다는 것인지 잠시 의문이 가기도 했지만 그 이유는 단 하나다. 이두 사람만이 중국보다 더 잘사는 나라를 꿈꾸었고 그것을 몸소 실천하였기 때문이다.
최치원은 너무나 유명한 시무(時務)10조(條)로 신라의 근간인 육두품의 신분제를 철폐하여 나라를 개혁하고자 하였고, 선조 때 의병장 조헌은 1574년 명나라 질정관(質正官)으로 가서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적은 동환봉사(東還封事)에서 ‘출신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등용해야 하며, 공노비와 사노비를 양민화하여 징병 자원으로 활용한다면 20년 뒤 100만의 정예 병사를 가질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주장을 펼쳤으니 나라에서 그것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초정은 이런 용기와 개혁의지를 가진 애국자가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귀감으로 삼아왔으며, 그가 북학의를 쓰기 위해 통진을 찾은 것은 그와 관련이 있었다. 고운의 근거지인 경주는 한양에서 너무 멀기에 중봉이 현감으로 있던 역사를 추억하고 불굴의 개혁정신을 상기하고자 상대적으로 가까운 통진을 선택한 것이다. 굳이 경주까지 간다면 그만큼 북학을 내놓는 것이 늦어지므로 초정에게는 통진이 탁월하고 유일한 선택이라 볼 수 있다.
그는 1778년 7월초 연경에서 돌아와 남산 밑에 있는 집에 잠시 들러 식구들과 대강 인사를 나눈 다음 도성 안에 머무르지 않고 곧장 통진으로 왔다. 그에게 청나라 이야기를 들으려고 찾아간 사람들은 그냥 헛걸음만 쳤다. 그는 북학의를 하루라도 빨리 써야겠다는 조급함이 있었고, 그 조급함은 빨리 어려운 나라를 구해야 된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석달 동안 두문불출하며 북학의를 마무리하던 그날은 통진에 비가 내렸고 그는 개혁 의지로 달아오른 마음을 가을비에 식히면서 서문의 끝을 이렇게 맺는다.
“현재 백성들의 생활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국가의 재정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관리들은 그저 팔짱을 낀 채 바라볼 뿐, 백성들을 구제하지 않을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모른 체하고 있을 것인가?”
북학이란 청나라의 학문으로, 생활과 백성에 직결된 것이다. 농사, 누에치기, 가축 기르기, 성곽의 축조, 집짓기, 배와 수레의 제작, 기와, 인장, 붓, 자를 제작하는 법 등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청나라가 명나라를 무너뜨린 오랑캐라고 폄하하였으나 박제가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차라리 명나라의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고자 한다면 20년 동안 빨리 청나라를 배워 우리나라를 발전시킨 후 함께 의논해도 늦지 않다고 했다. 당시 왕인 정조의 개혁 지지를 업고 있으면서도 사대부들은 명나라를 지지하며 북학론보다 북벌론을 내세웠으니 박제가의 개혁의 꿈은 만만치 않은 저항 앞에 자초되고 만다. 개혁을 서두르는 것은 병을 고치려고 독약을 마시는 것과 같으니, 시간이 가장 위대한 개혁가가 아니겠는가.
요즘은 시시때때로 비가 내린다. 하늘은 먹구름이고 코로나로 인해 누구나 마스크를 쓰다보니 눈만 뜨고 아웅하며 사는 형국이다. 경제는 바닥을 치고 미래는 불투명한데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으니 비 내리는 날은 더욱 우울해진다. 이런 때 빗속을 뚫고 박제가가 통진에 사는 내게로 와서 지금 뭘 하고 있냐고 꾸짖는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서 태극기 보급 선양 건의를 필두로 여행자 유치물품 자동계량시스템 개발, 외국어 동시통역시스템 운영, 열화상 감지 카메라를 이용한 우범여행자 적발, 수입물품의 원격검사 등의 도를 넘는 제안을 하였으니 거긴 늘 벽이 있고 그 벽을 넘어서기란 흑암의 좌절과 하늘의 별따기였다.
지금도 먹구름이 하늘을 가려 해도 별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냥 먹고 일하고 자고 하는 단순한 3가지 일상을 반복하는 게 정상이 되어간다. 비정상이 정상이 되어가는 세상에는 돌이킬 수 없는 역사를 더듬어 보는 일이다. 오래된 역사는 점점 화석화되어 불변의 진리로 굳어져 간다.
화석화된 토탄 속에 볍씨가 출토되어 무려 5천 년 전부터 벼농사가 이뤄진 것으로 보이는 통진 가현리는 대한민국 최초의 쌀농사 벼 재배지라는 수식어가 붙고 토탄농경유물전시관이 생겼다. 비가 이렇게 많이 내려 올해 벼농사가 흉년이 들면 어떡하지? <동국여지승람>에는 ‘북쪽으로 한강 하류에 임하여 토지가 평평하고 기름져 백성이 살기 좋은 곳’이라 홍수와 가뭄을 모른다는 길지에 초정이 불쑥 나타난 이유는 뭘까?
비 새는 집 눈 뿌리는 처마 밑에서 연구했고, 술 데우고 등잔 불똥을 따면서 손바닥을 치며 논의했던 실학파들의 궁극은 무엇일까? 제세구민(濟世救民 세상과 백성을 구제한다)이라며 ‘우물론’을 말했는데“, 무릇 재물은 우물과 같다, 우물물은 일정한 속도로 계속 퍼내야만 맑은 물이 솟아나고, 퍼내지 않으면 말라버리거나 썩어버린다.”고 하였지만 우중임에도 우물이 고갈되고 오염되어 더 이상 퍼낼 일이 없다. 사람들이 “비단을 입지 않으니 나라에 비단 짜는 여공이 없어지고, 그릇이 깨지건 간에 개의치 않고 사용하니 이는 예술의 오묘함을 모르는 것이라. 이에 필경은 나라의 공장과 도야가 없어지고, 기예도 사라지는 것이라.” 그리 말해도 침묵의 마스크만 쓰고 우산으로 가리는데 무슨 비단이 필요 있겠는가.
지금은 중봉처럼 목숨을 건 관리의 상소도, 초정처럼 시대의 지성에 흥분하고 절망하면서 끝까지 비난을 안고 싸울 의인도 없는가? 누구에게나 거침없이 자신의 감정을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는 솔직함을 가진 초정은 시대적 불화를 견디며 늘 꿈꾸던 것이 하나 있었다. 작은 집 짓고 고기잡고 나무하며 살고 싶어하면서도 그는 팔짱을 끼고 있지 않고 제 몸과 마음을 닦고 집안을 다스리는 제가(齊家)라는 자신의 이름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질 나라를 바로 다스려 세상을 편안하게 한다는 ‘治國平天下’는 이루지 못했으니 이렇게 비가 오는 날 통진을 다시 찾은 것은 백성들을 구제하겠다는 메시지가 아닐까? 비 내리는 가을 어느날 토탄농경전시장에서 오천년 전 볍씨를 보면서 나는 변치 않는 역사의 진실을 깨닫고, 그 옆에 있는 농가에서 북학의를 탈고하고 있을 시인 초정과 그 뒤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문인 중봉의 손을 꼬옥 잡게 될 것을 기대해 본다.
- 기자명 김포신문
- 입력 2020.08.19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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