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찬 소설가

밤새 김우희에게 들은 말을 몇 번씩 상기하며 종이에 깨알 같은 글씨로 기록했습니다.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들어 일어난 시각은 정오였습니다. 점심을 먹고 토정 선생을 찾으니 양성지 영감의 발음치료를 하고 있다는군요. 오후에 종기 잘 짜는 의원을 찾아가 내 혹을 자를 수 있겠느냐고 하자 경험이 있는 의원을 소개 주었습니다. 나는 한 시각이나 걸려 의원을 찾아가 종이에 쓰인 대로 설명하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는 조그만 혹은 몇 번 떼어 보았지만, 백정과 함께한 적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솜씨 좋은 백정을 구한 다음에 연락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의원의 집을 나오면서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김우희가 내려다보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혹을 몇 번 툭툭 치고는 굿바이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리고는 씩씩한 걸음걸이로 오늘 초대받은 대갓집 별장이 있는 전류리로 가기 위해 배를 탔습니다. 도성의 고위 벼슬아치들이 한강에서 뱃놀이한다는군요. 썰물을 타고 가기에 금세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걸어서 갔더라면 반나절은 걸렸을 것입니다. 전류리는 서해에서 조강을 통해 급한 물살을 타고 한강으로 가는 마지막 지점입니다. 여기까지 왔다가 다시 물살이 뒤집혀 썰물로 변하지요.

도착하니 화려한 놀잇배 몇 척이 떠 있었고 차일이 쳐진 곳에는 한참 잔치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악공의 연주와 기생의 춤이 끝난 뒤에 재담을 하게 될 것입니다. 도성에서 온 기생들이라 모두 꽃처럼 예뻤고 옷도 화려했습니다. 넋을 놓고 바라보았지만 도야지, 아지 아씨보다는 예쁘지 않았습니다. 예뻤다면 화장빨이겠지요. 드디어 저의 차례가 왔습니다.

“재담꾼 풍문이 인사 올립니다.”

꾸벅 절했지만, 반응은 저건 뭐야? 하는 반응입니다. 언짢았지만 이 시대에 재담꾼이 없으니 이해하기로 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이부(吏部)의 아전이자 왈패인 장오복 이야기입니다.

“장오복이라는 아전이 있었습니다. 이름난 협객으로 약자를 괴롭히는 강자가 있으면 힘으로 제압해서 명성을 날렸습니다. 오복을 따르는 주먹패들도 많았지요.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이웃에 가죽신을 만드는 갖바치가 있었는데 매달 가죽신 한 켤레를 오복에게 바쳤습니다. 몇 달 뒤 까닭을 물으니 어려운 부탁이라 감히 말하지 못하겠다고 하니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연모하는 기생이 있는데 상대를 안 해 주니 대인께서 저를 도와주십시오.”

갖바치가 눈물까지 글썽이며 애원하니 잠시 생각하던 오복이 계책을 들려주며 말했습니다.

“대담하게 행동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실패로 끝난다.”

하고는 약속한 날에 장오복은 부하들을 이끌고 갖바치가 연모하는 기생의 집에 갔습니다. 장안의 깡패 두목이 나타났으니 기생집은 그들 일행을 맞기 위해 부산을 떨었습니다. 막 자리에 앉으려는데 불한당 행색의 남자가 들어오더니 소리쳤습니다.

“오복이라는 놈이 누구냐?”

그러자 장오복이 발끈해서 바라보다가 갑자기 안색이 변하더니 뒷문으로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두목이 도망치자 부하가 왜 그러시냐고 묻자 불한당이 대답합니다.

“장오복이란 놈이 사람들에게 사납게 군다 하니 실컷 두들겨 패려고 한다. 어디 있느냐?”

그 말에 부하들도 슬금슬금 뒤로 뺐습니다. 완력이 세고 대담한 두목이 질려서 도망쳤는데 자신들이야 한 주먹거리도 되지 않는다고 짐작했던 것입니다. 이들이 모두 도망치자 이것을 지켜본 기생이 불한당으로 변장한 갖바치를 정중하게 자기 방으로 모시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날 저녁. 소원을 푼 갖바치가 잔뜩 선물을 가지고 와서 사례했습니다.”

미리 갖바치와 짜고 도망치는 연기를 했던 오복이 빙그레 웃으며 이것은 둘만의 비밀이니 남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제가 눈을 부라리며 주먹을 불끈 쥐며 연기를 한 것이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거드름피우던 벼슬아치들이 너도나도 술잔을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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