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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잔소리 철학> 법의 유연성
신상형
안동대학교
(철학)명예교수

삼십 년도 더 된 얘기다. 이웃 도시에 살던 친구가 찾아와 도움을 청했다. 괜찮은 변호사를 한 사람 소개해 달라고 했다. 이유인즉, 자기 누이 중 하나가 유산배분에 앙심을 품고 법원에 재심청구를 했다는 것이다. 이 친구는 다섯 누이를 가진 막내로 부모가 일찍 돌아가시면서 전 재산을 거의 통째로 물려받은 행운아였다. 그러나 유산상속을 처리한 지가 수년이 지난 뒤라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 의아스러웠다. 게다가 내가 알던 법 상식은 한 번 종결한 절차는 번복하지 않는다는 원칙이었다. 때문에 나는 친구를 격려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이미 다 끝난 건데. 그리고 지금 새삼스럽게 한다고 해봤자 판사가 기각시키겠지. 걱정할 것 없네.” 하면서 그를 돌려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친구가 더 심각한 얼굴로 찾아왔다. 재판이 진행되었고, 자기가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법원이 재심 청구를 받아들였고, 억울하다고 연대한 누이 세 사람이 이제 기세등등하게 자기를 걸고 파렴치범으로 몰아가고 있어서 집안사람들과 동네 지인들 앞에 면목이 없다고 했다. 해서 대학 후배인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괜찮은’ 변호사를 물색해서 법적 투쟁에 나섰다. 그는 유리한 판결을 이끌어 냈고, 불을 껐다고 한 숨을 돌렸다. 그런데 종결될 듯한 재판은 계속되면서 상대측이 유리하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아연실색한 친구와 나는 변호사 후배에게 내막을 물었다. “선배님, 재산권 분쟁은 오래 끕니다. 게다가 법리논쟁은 미묘해서 유불리한 증거는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습니다. 뿐더러 (충격적이시겠지만) 양측 변호사들이 서로 연락하면서 일을 진행하는 것 같습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배신감을 느꼈다. ‘뭐 이따위 사람들이 있어? 그래서 변호사들을 사기꾼들이라고 하는 구나’는 생각이 들면서 친구에게 냉정을 되찾으라고 권유했다. 후배에게 대안을 물었다. 그는 “합의하시죠. 그러면 양측이 덜 손해를 보고, 상처도 덜할 겁니다. 그리고 누님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그 많은 재산을 남동생 혼자서 차지한다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겁니다. 이번에 한 덩어리를 나눠주시지요.”라고 충고했다.

이 일은 당시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분명하다고 느낀 법은 허물 허물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한번 정해진 법 규정을 법 스스로가 무시하고 뒤집는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눈으로 변호사들을 바라보니 그들은 법을 이용하여 취리하는 냉혈한들이었다. 그런데 살다보니 법의 의미가 점점 다르게 이해가 되었다. 변호사 후배는 법률구조공단에서 약자들을 위해 수년간 근무하였었다. 사람을 중시한 그는 법정의 최고 목표는 합의임을 가르쳐주었다. 목표점에서 본 법의 정신은 근본적으로 유연함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법法 이라는 한자어는 물 수변에 갈 거자가 합친 것이다. 물이 흘러가듯 부드러운 것이 법의 실태이고 유연성이 법의 정신이다. 대지를 흘러가는 물은 직각으로 가는 법이 없고 꾸불꾸불한 사행천을 이룬다. 필요에 따라 인간들은 각을 만든다. 그러나 자연법을 어기는 정도로 벽을 쌓거나 바닥을 파내면 벽은 터지고 바닥은 파묻힌다. 예를 들면, 지금 정부가 하고 있는 주택정책은 법의 유연성을 무시하고 시행세칙을 법처럼 오용하는 데서 빚어내는 비리의 남발이다. 문제를 피하지 못하고 역풍을 만나게 되어 있다. 몸통인 법정신을 무시하고 꼬리인 세칙으로 얽어매는 현 정권의 무지와 미련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게다가 사과도 할 줄 모르니 한심하다.

법의 유연함은 인간을 향해 있다. 나는 친구의 사건을 계기로 합의라는 행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아무리 좋은 원칙도 불편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음을 자녀교육을 통해 경험하였다. 내가 최고라고 생각한 원칙을 가훈으로 만들고 아이들에게 강요하니 그들은 문제아들로 변하였다. 원칙보다는 무조건적 사랑으로 아이들의 무리한 요구까지 들어주는 한심했던(?) 아내의 무원칙적 합의가 결국 우리 가족의 3/4의 결정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면서 내 발언권은 점점 힘을 잃어갔다. 이제 가정에서 내 지위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고 하였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남은 힘을 가족들의 합의에 써 볼 생각이다. 그래야 현실적으로 목숨이라고 부지할 것이 아닌가. 수해水害는 무섭다.

 

김포신문  gimpo12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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