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녀바위 / 독우물 / 검은바위 / 산신제
▲ 고정리 지석묘(高亭里 支石墓)
▲ 심연원 신도비(沈連源 神道碑) / 심강 신도비(沈鋼 神道碑)
통진읍의 문화재

◈ 경기유형문화재

심연원 신도비(沈連源 神道碑)

■ 지정번호 : 경기유형문화재 제146호
■ 지정연도 : 1992년 12월 31일
■ 소 재 지 : 통진읍 옹정리 산 14-2
■ 시 대 : 조선시대
■ 분 류 : 석 비
심연원의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맹용(孟容), 호는 보암(保庵)이다. 영의정 심회의 증손, 사인(舍人) 심순문의 아들로 태어나 김안국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16년(중종 11) 생원, 1522년(중종 17)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 정자(正字)를 거쳐 예문관 검열, 대교, 봉교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사헌부 감찰과 공조, 예조, 이조좌랑을 지내고,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한 뒤 검상, 사복시부정을 거쳐 진휼 경차관(敬差官)으로 굶주린 백성의 구제에 힘썼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위사공신(衛社功臣) 2등에 녹훈, 청성군에 피봉된 뒤 감춘추관사가 되어 《인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1537년(명종 2) 좌참찬, 예조판서, 우찬성, 판의금부사, 좌찬성을 거쳐 우의정, 영의정, 청성부원군에 진봉되었다. 명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충혜(忠惠)이다.
1992년 12월 31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46호로 지정된 심연원 신도비(沈連源 神道碑)는 1560년(명종 15)에 건립되었으며, 묘역에서 산 아래쪽으로 80여m 떨어진 곳에 있다. 2단의 지대석 위에 귀부·비신·이수를 갖춘 복고풍이다. 이수의 조각은 잘 되어 있으나 귀부는 생동감이 적다.
비문은 아들 심강(沈鋼, 1514∼1567)의 부탁으로 판중추부사 정사룡(鄭士龍, 1491∼1570)이 지었다. 글씨는 송인(宋寅, 1516∼1584)이 썼는데 전형적인 송설체(松雪體)이다. 두전(頭篆)은 조카 병조참지 심전이 썼다.
비문에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명신 심덕부(沈德符, 1328∼1401)를 비롯한 심온·심회(沈澮)·심원·심순문(沈順門) 등 선조의 약력에 이어 심연원의 성장 과정과 영의정에 오르기까지 관리로서의 활동, 병을 이유로 벼슬을 사양하는 과정 및 근신한 행동, 너그러운 성품 등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경기유형문화재 ◈

심강 신도비(沈鋼 神道碑)

■ 지정번호 : 경기유형문화재 제147호
■ 지정연도 : 1992년 12월 31일
■ 소 재 지 : 통진읍 옹정리 산 14-2
■ 시 대 : 조선시대
■ 분 류 : 석 비
1992년 12월 31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47호로 지정되었다. 1592년(선조 29년) 9월에 건립된 심강(沈鋼, 1514∼1567) 신도비(神道碑)는 지대석 위에 귀부·비신·이수를 갖춘 복고풍의 비로, 귀부 밑에는 다시 지대석이 2단으로 놓여져 있다. 비신을 귀부의 머리·꼬리 방향으로 세운 것이 특이하다.
심강은 조선시대 명종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백유(佰柔)이다. 영의정 심연원의 아들로 태어나 명종의 장인이 되었다. 1543년(중종 38) 진사시에 합격하여 음보(蔭補)로 활인서 별좌가 되고, 그의 딸 인순왕후가 명종 비로 간택되자 1546년(명종 1) 청릉부원군에서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1548년(명종 3년)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되었으나, 부친상을 당해 한때 사직했다가 다시 영돈녕부사 겸 도총관이 되었다.
대리석 비신의 비문은 심수경(沈守慶)이 찬하고, 심열(沈悅)이 서(書)와 전액하였다. 비문은 영중추부사 심수경이 짓고, 손자 심열이 썼다. 글씨는 송설체로 짜임이 좀 미숙하다.
비문에는 고려 말·조선 초의 명신 심덕부(沈德符)를 비롯한 심온(沈溫)·심회(沈澮)·심원·심순문(沈順門)·심연원(沈連源) 등 조상의 약력에 이어 심강의 성장과정과 관력 및 그의 효성과 덕행 등이 기술되어 있다. 이어 부인과 심인겸·심의겸·심예겸 등 여덟 아들과 손자들에 대해서도 약술되어 있다.
◈ 경기기념물

고정리 지석묘(高亭里 支石墓)

■ 지정번호 : 경기기념물 제91호
■ 지정연도 : 1986년 9월 7일
■ 소 장 : 국유
■ 소 재 지 : 경기 김포시 통진면 고정리 산114-3
■ 시 대 : 청동시대
■ 크 기 : 길이 약 2.3m, 두께 0.83m이곳 구릉 지대에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여겨지는 고인돌이 모두 3기가 있다. 1기는 탁자식인데 덮개로 사용된 돌은 석영으로 길이는 약 2.3m, 두께는 0.83m이다. 나머지 2기는 받침돌 부분이 땅 속에 묻혀 있어서 정확한 구조를 알 수 없다.
상석은 석영암 계통으로 기정도이며 형태는 타원형이다. 이 지석묘는 1986년에 조사 보고된 것으로 모두 석실이 지상에 만들어지는 전형적인 탁자식 지석묘인 점이 독특하다. 상석의 무게로 인하여 부분적으로 지석이 무너진 것도 있으나 모두 석실을 확인할 수 있다.
강화도 유적과 인접해 있어 탁자식 지석묘 문화의 분포상태를 파악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유적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탁자식 고인돌은 한강 건너편의 파주시 교하면(校河面) 다율리(多栗里)·당하리(堂下里)·교하리(校河里) 등에서도 발견되는데 이들 고인돌을 통해서 일찍부터 한강 유역에 취락생활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통진읍의 전설

◆ 처녀바위
통진읍 서암리와 귀전리는 산수가 수려하여 예로부터 살기좋고 평화로운 마을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이 곳에 갑자기 바위가 돌출해서 마을의 평화를 깬 전설이 전해진다.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서암리와 귀전리 경계지점에 여인상의 바위가 갑자기 돌출하면서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예의 바르던 귀전리 여자들이 이 때부터 갑자기 친족, 근친과 불미스런 행실을 할 뿐 아니라, 매년 나쁜 일이 계속되어 부락 주민들은 전체회의를 열어 그 바위를 부수기로 결의하였다. 주민들은 바위를 쓸어 묻어 보자고 재차 결의하는 등 의견이 분분하다가 끝내는 땅 속에 묻었다고 한다.
그 후, 귀전리 마을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으나 서암리에서 갑자기 횡액(橫厄)이 생기기 시작하자 서암리 주민들은 바위를 다시 파내어 보이게 하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귀전리 주민들은 그냥 묻어 놓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동네간에 서로 싸움이 계속되었는데 싸움에 지는 부락에 계속 횡액이 겹치곤 하였다 한다. 1960년대 한강토지개량조합에서 수로둑을 만들 때, 그 바위는 매몰되어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고 그 후부터는 그런 일이 없어졌다 한다.


◆ 독우물

통진읍 옹정리에 도승(도를 깨달은 중)이 독을 쓰고 죽었다 하여 ‘독우물’이라는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조 세종대왕 때 경상도 청송군에 심연원(沈連遠)이라는 총명한 소년이 있었는데 그 손녀이 어찌나 총명했던지 6세의 나이로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판서에 제수되었으며, 14세에 영의정에 승진하여 국정을 다 맡다시피 하던 중, 24세때 좌찬성(左贊成) 박완의 모해(謨害)를 받아 강화로 유배되어 12년을 보내다가 다시 세종대왕의 부름을 받아 영의정으로 봉충(奉忠)하던 중 63세의 일기로 돌아가셨다.
세종대왕께서 국장을 하명하시어 이 분의 유배지인 강화도 남문안에 안치하라는 분부를 거행하기 위해 강화로 가던 중 이곳을 지나다가 상여의 장강 나무가 부러져 행렬을 쉬고 있었다. 이때 도승(道僧) 한 사람이 나타나 상주(喪主)에게 말하기를 매인의 운세를 보아 강화도 남문안에 안치하면 후일에 가운이 좋지 못할 것이니 소승이 자리를 보아주겠다 하고, 지금 이 곳에 안장하라는 말을 들어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였다.
도승의 말이 산소를 만들되 물은 반드시 처음 발견된 하단부의 물을 사용하고 광중을 파되 바위가 비칠 것이니 이를 파괴하지 말고 모시라 했다. 만일 바위를 파괴하면 명기(明氣)가 날으며 명기 가운데 왕벌이 날 것이요, 왕벌이 날면 소승은 왕벌에게 쏘여 죽을 것이고 소승이 소재하는 절도 폐허가 되고 상주의 후손에게 벼슬이 끊기고 손(孫)이 귀해질 것이라는 당부를 한 뒤 도승은 이미 산성(山城) 나루(지금의 성동리)d에 가서 독을 쓰고 앉아 있었다.
광중을 짓다보니 너무 얕아 상주가 도승 말을 듣지 않고 바위를 깨니, 도승의 말대로 왕벌 한 쌍이 와서 묘소 주변을 세 바퀴 맴돌고 강화쪽으로 날아갔다. 급기야 도승을 데리러 가 보니 도승은 그 나루를 건너지 못한 채 왕벌에게 쏘여 죽었고 산소앞 절도 폐허가 됐다.
독우물은 좀 높은 곳에 있는데 1965년 당시 인근 주민이 손질해서 농업용수에 큰 몫을 했으나 지금은 없어졌으며 도승이 독을 쓰고 죽었다 하여 독우물이라 하였다고 한다.

◆ 검은바위
통진읍 서암5리 가운데 마을 서쪽 산뿌리에 있는 바위에 오르면 동남쪽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인다. 동으로 봉성산과 넓게 펼쳐진 누산리 평야가 한 눈에 들어올 뿐만 아니라 한강 너머 저 멀리 삼각산도 시야에 들어온다. 남으로는 가현산과 장릉산이 보이며 수맥이 서쪽 검은바위에서 발원하여 동으로 흐르는 곳이라 산세가 묘하여 옛날부터 지관들이 자주 모여들어 반드시 이 곳에 명당자리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한다.
도선같은 명지관도 여러 차례 이 곳을 헤맸으나 명당자리인 와우형 묘자리를 찾지 못했다 한다. 그 이유는 이 검은 바위가 영험하여 아무리 명지관이라도 찾지 못하도록 신술을 쓰기 때문이며, 언제든지 이 동네를 빛내고 나라를 빛낼만한 인물이 나와야 비로소 지관들이 찾을 수 있게 이 검은바위가 지시할 것이라는 전설이다.
옛날에는 주민들이 신비의 바위라 하여 이 바위를 동네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제사도 지냈으며, 고민거리가 있거나 원통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바위에 그 일의 해결을 빌었다는 전설도 있다.



◆ 산신령

예전엔 통진읍 동을산리의 주산인 야산 정상에서 산신제를 올렸다. 이 산신은 마을의 수호신으로 주민들과 마을의 평화와 안녕을 빌고 한편으로 경로효친을 기르는 행사로 수호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산신제를 지내는 절차는 음력 정월 초사흘 날이 되면 매년 동네에서 한학에 고양한 지식을 갖춘 분들이 모여 150여 호 중 생기복덕을 보아 식구들이 전부 당해연도 운세가 좋은 집을 골라 도가(제사를 차리는 집)로 정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기복덕이 좋은 집이라도 가족의 여성 중 불편한 사람이 있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도가를 정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다음으로는 제관(산신제를 지내는 사람)과 축관(축문을 읽는 사람)을 정하고, 다음으로 산신제 날을 정하였다고 한다. 150여호 중 복덕이 좋은 도가, 제관, 축관, 산신제 날을 정하는데 하루종일 걸렸다.
이 모든 것이 정해지면 조라(제주)를 정하는 시간에 본산에 올라 술을 담궜고 마을에서는 술을 담근 날부터 외출하여 자주 오지 못하며 만약 마을에 들어온 사람이 자게 되면 산신제를 지낸 다음 나가도록 했다. 그 이유는 나가서 자거나 이 마을에 들어와서 산신제를 지내기 전에 가면 산신이 노하여 재난을 입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후에는 쌀 3되 3홉으로 백설기를 짓고, 밤 1홉, 대추 1홉, 소머리를 하나 구입하여 제삿날 자시(12시)를 경과해서 산신제 터에 가서 제사를 지냈는데 마을에 부정한 일이 있게 되면 다시 좋은 날을 잡아 지냈다. 그러나 보통 정월 보름 전에 지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소머리(우두) 제두를 사용하던 것을 돼지머리로 바꾸어 사용했다고 한다. 돼지는 온 몸이 흑색이어야 하는데 산신제날을 잡은 날부터는 온 마을 사람들이 순 흑색 돼지를 잡으려고 인근 동네를 찾아다니며 구했다 한다.
옛날 어느 선비가 한양에서 개성으로 말을 타고 주산을 넘어 조강 나루터를 가던 중 갑자기 말이 서서 꼼짝하지 않아 하인들이 말의 고삐를 당기고 하는 등 갖은 짓을 해도 움직이지 않아서 말에서 내려 주산님께 큰절을 올리고 비니까 말굽이 떨어져 그 선비는 걸어서 주산을 넘은 뒤에 말을 타고 갔다는 말굽이 밭의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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