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형
안동대학교
(철학)명예교수

영국에는 공공건물에 예외 없이 커먼룸(common room)이라는 공간이 있다. 휴게실인데, 아무 때 아무나 와서 편하게 대화를 하거나 비치된 커피와 홍차를 마시는 곳이다. 홍차 곁에는 적당한 찻값을 넣는 그릇이 있다. 차를 마시고 알아서 돈을 내는데, 얼마라는 기준은 없다. 짐작컨대 마신 차 값 정도를 넣는다. 30년 전 경험으로는 대학이나 교회나 공공도서관에는 거의 다 이런 커먼룸이 있었다.

한번은 직원에게 얼마를 두면 이상적이냐고 물었더니 ‘너무 많지 않아야’ 된다고 했다. 그 대답으로 더 당황스러웠다. 너무 많지 않게 두면서 동시에 휴게실 찻값은 돌아가게 하는 수준을 얘기하는 모양인데, 나는 그감각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필요를 일치시키는 공통된 common 감각 sense을 그들은 상식 common sense이라고부른다. 영국인은 삶에서 서로 공유하는 이런 상식을 치밀한 법리나 논리보다 우선시한다. 해서 그들은 조문을 중시하는 성문법 보다는 상식을 우선하는 불문법을 채택한다. 현대철학자 무어 G.E. Moore의 <상식의 옹호>라는 명저는 이를 보여준다.

30년 전 영국에서 처음 접한 휴게실 장면은 상당히 충격이었다. 당시 우리 한국사회는 이 정도의 공공도덕을 갖지 못하였다. 유학생 자녀들이 common room을 공짜로 이용하거나 돈을 훔쳐온 사실을 친구들끼리 무용담으로 자랑했을 정도니까. 살펴보면 휴게실 상식은 단순히 음료수만이 아니라 대화도 일정 수준의 고품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당당한 독일인이나 오만하기까지한 프랑스나 미국인들의 음성과는 달리 조용하고 수줍어하는 영국인의 말소리는 정치 논쟁 때를 제외하면 한심할 정도로 쳐져보였다. 보행자우선 길거리에서도 차와 사람이 서로 양보하는 모습은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비효율적인 상식(?)이었다. 길에서 돈을 주우면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고 자신 있게 대답 했다가 주운 곳 가장 자리에 두어야 한다는 담임교사의 말을 들은 딸을 달래느라 며칠을 고심했던 일은 영국과 우리 상식이 얼마나 달랐던가를 말해주는 생생한 기억이다. 어쨌든 그때의 영국상식은 그랬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힘없는(?) 영국의 상식이 세계적 고품격으로 취급받고 있다.

한편 상식은 유기물과 같다. 고정된것이 아니라, 사회구성원들이 당대의 상식을 만들어 간다. 이전의 상식이 유지되기도 하고 폐기되기도 한다. 다른 모습으로 고쳐지기도 한다. 좋은 상식도 있지만 나쁜 것도 있다. 이롭기도, 해롭기도 하다. 상식은 사람들의 생각을 시작하고 계속하고 끝내게 한다. 그럼에도 불변하는 사실은 공통적으로 감지하여 상호 통용하면서 소통을 이루게 하는 원천이 상식이라는 것이다. 상식은 따라서 존중되어야 하고 지켜져야 한다. 사람들의 품위를 유지하려면 상식은 우선적으로 배려되어야 한다. 상식을 잘 지킬 때 사회는 건강해지고, 건강한 사회는 건전한 상식을 확대해 간다. 건전한 상식이 두껍게 공유되는 사회가 선진사회이고 선진사회의 구성원은 명실상부한 ‘양반’ 혹은 귀족이 되는 것이다.

진정한 양반 혹은 귀족은 말과 행동이 일치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이상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솔선수범하게 된다. 로마의 귀족들은 제국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품격 있는 언행을 특히 재난시에 헌신적으로 실천했다. 이런 전통은 서양의 선진국에서 지금도 전수되는 상식이다.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 사회는 이런 상식이 불통되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6.25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군을 홀대하고, 성희롱 혐의로 자살한 시민 대표를 같은 당이라는 이유로 맹목적으로 옹호하여 피해자들을 괴롭히면서 사람들을 갈라 싸움을 부추기는 행태는 상식을 잃은 데서 오는 비정상이다. 이런 정부 지도자들의 몰가치적 언행으로 나라와 민중들은 품위를 잃어간다.‘ 이게 나라냐?’고 외치면서 권력을 쟁취한 현 정권에게 물을 때가 되었다‘. 이게 상식을 가진 나라냐?’ 물론 나도 이 다그침에 대답할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제 우리 모두는 진지한 반성으로 상식을 찾아 회복시켜야 한다. 그 어떤 이유로도 건전한 상식을 깨는 어리석음은 범치 말아야 한다. 상식은 우리를 하나로 만드는 최소한의보루이다. 상식을 제대로 지켜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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