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반 영근이는 대부분의 아이들과 달리 이웃 지역의 ○○중학교를 나온 아이였다. ○○중학교는 작은 규모의 학교라서 한 학급에 많아야 서너 명 정도가 같은 학교 출신이었다. 우리 반에도 ○○중학교 출신 아이들이 네 명 있었는데, 이 친구들은 등하교를 같이 해서 학급에서도 자기들끼리만 친하게 지내는 편이었다. 하지만 영근이는 ○○중학교 출신의 아이들과는 형식적인 인사만 나누는 정도였다. 다른 아이들은 음악 듣기를 좋아하고,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약간은 내성적인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영근이는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뛰어놀기를 즐기는 아이였다. 그리고 운동도 잘하고 얼굴도 잘생겼고 학업성적도 좋은 편이라 여학생들에게 인기도 많았다. 그런 영근이가 송이와 함께 나를 찾아왔다.

“선생님, 저희가 많이 생각하고 찾아왔는데요. 저희 오늘만 조퇴시켜 주시면 안 되나요?”

“조퇴? 어디 아픈 곳 있어?”

“아뇨, 아픈 건 아닌데요. 이유는 묻지 마시고 그냥 조퇴시켜 주시면 안 될까요?”

“아픈 건 아니고, 이유는 말할 수 없고 그냥 조퇴를 시켜 달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사실은 송이랑 오늘 그냥 무단으로 나갈까 하다가 그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서 선생님께 말씀드리러 왔어요. 선생님이 실망하실까봐 말씀드리러 온 거예요.”

“맞아요. 정말이에요. 저희 사고치지 않을게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래. 너희들을 믿지. 그래도 많이 궁금하구나. 나중에라도 꼭 이야기 들려줄 수 있지?”

“네, 고맙습니다.”

아이들을 보내고 나서 이런 저런 걱정에 생각이 많아졌다.

다음날 영근이와 송이가 환한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선생님 어제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송이랑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어요.”

“어제 어디에 다녀온 거야?”

“그냥 답답해서 송이랑 바람 쐬러 인천에 다녀왔어요.”

“둘이서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내게 들려줄 순 없어?”

“조금 더 정리되면 선생님께도 말씀 드릴게요.”

그날 이후 영근이와 송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두 아이의 외출이 있고나서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영근이가 다시 나를 찾아왔다.

“선생님, 오늘 저와 상담해 주실 수 있어요?”

“오늘? 그럼 이따가 자기주도 학습시간에 교무실로 올래?”

“아뇨. 오늘 선생님 댁에 가서 자도 돼요?”

“우리 집에? 집에 무슨 일 있니?”

난 학교에서 20여분 떨어진 곳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영근이의 집은 나의 자취집과 가까운 편이었지만, 자신의 집이 있음에도 우리 집에서 자려고 하는 영근이의 이유가 궁금했다.

“아뇨, 특별한 일은 아니에요. 이따 말씀 드릴게요.”

그날 영근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근이의 부모님은 작년에 이혼을 하셨다고 한다. 어머님은 다른 곳에 계시고 영근이는 아버지, 누나와 함께 따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아버님이 재혼을 준비하고 계신다고 했다. 자신은 아직 새엄마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아버님이 재혼을 서두르는 것 같아 많이 섭섭하다고 했다. 가끔은 어머니를 만나보고 싶은데, 그것도 쉽지 않아 며칠 동안 마음이 많이 무거웠단다. 작년에 송이와 같은 반이었는데, 송이는 자신의 상황을 아는 몇 안 되는 친구란다. 최근 영근이가 힘들어 할 때 송이가 먼저 다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도움이 많이 됐다고 한다. 인천으로 바람을 쐬러 간 날 영근이는 송이에게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 했고, 자신의 고민을 털어 놓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는 것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영근이는 그날 이후 눈에 띄게 학교생활을 열심히 했다. 그리고 영근이는 자신의 집보다 우리 집에서 자는 일이 훨씬 많아졌다.

처음에는 영근이가 우리 집에서 잤다는 사실을 비밀로 했었다. 하지만 어느새 우리 반 아이들 대부분이 영근이가 우리 집에서 잠을 잔다는 걸 아는 듯 했다.

“선생님, 선생님이랑 영근이한테서 같은 향기가 나요.”

“무슨 말이야?”

“선생님이랑 샴푸, 화장품, 향수 뭐 이런 걸 같은 걸 사용하나 봐요.”

“아, 그래? 영근이가 나를 많이 좋아하나 보다.”

“혹시 선생님이랑 영근이랑 같이 사는 거 아니에요?”

“아니야, 왜 그런 생각을 해?”

“요즘에 선생님이랑 영근이랑 같이 등교하시잖아요.”

“내가 출근하는 길에 영근이 태우고 오는 거지.”

“아닌 것 같은데, 저희도 선생님 댁에 가 보고 싶어요.”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아이들이 나의 집을 찾게 됐다. 우리 반 남자 아이들을 그룹으로 나누어 집에서의 취침상담을 실시하게 됐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먹을 음식들을 각자 준비해서 집에서 저녁을 만들어 먹고 이야기를 나누다 잠을 자는 상담이었다. 아이들과의 취침상담은 학교에서 해왔던 기존의 상담과는 느낌부터 많이 달랐다. 무언가 해답을 건네주고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냥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가진 힘은 매우 컸다. 집에서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고 대화를 나누며 잠을 잔 것이 갖는 특별함이 있었다.

남학생들과의 취침상담이 알려지면서 여학생들의 불만이 늘어갔다. 그래서 여학생들과는 주말을 이용해 우리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들을 가졌다. 단지 공간만 바뀌었을 뿐인데 아이들은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내게 나눠 주었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면, 아이들이 상담을 통해서 원하는 것은 해결책을 찾아 달라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의 이야기를 잘 들어 달라는 것. 그것이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었다.

아이들과 학교가 아닌 공간에서 만나고 음식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아이들이 보여준 모습이 현재의 나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후로 해마다 아이들과 야영을 하고, 주말을 이용해서 학급활동을 하고 집에 초대해서 음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 과정을 통해 아이들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지금도 영근이와 만남을 갖고 있다. 어느새 30대 중반의 두 아이의 아빠로 열심히 살아가는 영근이와 소주 한 잔 하며 옛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20대의 젊은 청년으로 돌아간 느낌이다. 영근이에게는 화장품의 향기가 아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의 향기가 난다. 난 그 향기가 참 좋다. 나도 그런 향기를 풍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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