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형
안동대학교 명예교수

1973년 5월 둘째 주 대도시의 자취방에서 진로 모색을 위해 나는 내 인생 전체를 건 고민을 하고 있었다. 홀로였다. 시골에 계신 가난하고 문맹인 부모님은 전혀 기댈 언덕이 아니었다. 게다가 형제자매들은 뿔뿔이 각자도생하느라 여력이 없었다. 실업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친 말단공무원 시험을 실패한 터라 입에 풀칠하는 일이 화급했건만, 19살 소년은 당장 목전의 취직보다 앞으로 펼쳐질 원대한 인생행로에 착념하는 바람에 배고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민은 깊어져서 물만 마시며 사나흘을 훌쩍 넘겼다.

나의 고민은 무엇을 해야 먹고 사나, 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출세하나, 도 아니었다. 무엇을 해야 후회 없는 인생을 사나, 가 화두였다. 그러려면 힘들어도 대학을 나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농고졸업생인 내가 당연히 농대에 진학하여 멋진 농민이 되여야지, 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 짚어보니, 몸이 약한 내게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먹거리 해결은 원대한 이상 설정과는 거리가 있었다. 법대나 상대는 인기가 있었는데, 취직을 잘하려면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만드는 일류고등학교 출신이어야 가능했다. 공대는 너무 딱딱한 기술자가 되는 거였고, 의대는 내 형편상 갈 처지가 못 되었다. 자연히 순수한 인문학으로 관심이 갔다.

문학과 역사와 철학을 두고 장고를 거듭했다. 막판에 철학에 내 관심이 꽂혀 전공으로 결정하고, 최종 직업으로는 교수가 되기로 결단했다. 이런 꿈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곳에 가서 어떤 과정을 밟아야 할지, 그것은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는 아직 오리무중이었다. 다만 진로 선택을 위해서만 고민에 고민을 하다보니 꼬박 한 주가 흘렀다. 온 몸은 타들어가고 행색은 지저분해졌지만, 너무나 홀가분한 맘으로 일어나 간단하게 허기를 때우고 산에 올랐다. 모든 나무와 흙과 돌이 나를 반기는 것을 느꼈다. 그 이후 나는 지금껏 나의 진로를 걱정하거나 후회해 본 일이 없다. 비록 나의 부족으로 머리에 그렸던 일류철학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혹시 또 한 번의 인생이 펼쳐진다면 철학자로 살고 싶은 것은 그때의 고민 덕이다. 좀 더 훌륭한 모습을 갖추어서.

언젠가 90을 넘긴 일본 사람들에게 지금 인생에서 무엇이 제일 후회되는 일인가고 물었더니, ‘마음에 품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과감하게 몸을 던져 일을 저질러 보지 못하고 늘 조마조마하면서 요모양 요 꼴로 산 일’이라고 대답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꼼꼼하고 합리적인 일본인들도 저런 모험심을 품고 있구나 하는 사실에 내심 놀랐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형편에 기대어 좌절들을 쟁여가며 사는 소극적 인생을 살면서 불만을 갖고 있다. 그래서 아일랜드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버나드 쇼는 위트에 넘친 묘비명에,“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라고 우리의 삶을 단적으로 표현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좋은 부모를 만나 공부 잘 해 좋은 대학을 가고 훌륭하게 직장생활을 하며 가정을 꾸리고 여유 있는 생활을 하는 소박한 꿈을 꾼다. 또 부모들도 그런 생각에 이견이 없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이미 선진국에 진입했으니 이런 욕구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도하다.

그런 입장에서 우리 세대는 참으로 고생을 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불쌍한 사람들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많은 이상을 과감하게 모험하면서 살았으니까. 그런데 유복한 젊은 세대들은 한 번쯤 돌아봐야 한다. 세상에 대해 자기의 고민과 시각을 갖지 않은 채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고, 만지는 대로 느끼며 맹목적인 인생을 살지는 않는지. 결정 장애를 겪지는 않는지. 졸업을 앞 둔 대학생이 장차 무엇을 할지 인생을 채워갈 의미가 무엇인가는 미루어 둔 채 돈과 여가만을 생각하여 취업을 하고, 별 고민 없이 이직을 예사로 하는 것을 보면, 인생을 결단하는 고민을 해보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속담에‘ 실은 바늘의 허리에 묶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귀에다 꿰어야 한다’고 한다. 얄팍하거나 불만 섞인 인생살이는 제대로 된 고민으로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 하고 싶은 삶을 사는 사람으로 그득한 사회는 안정된 사회이다. 인생을 건 고민의 시간은 결코 낭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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