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쑥, 불혹

 

유정이

 

길 안쪽에 엎어졌는데

몸 일으키니 길 바깥이었다

어디로든 나갔다 생각했는데

둘러보니 부엌이었다

밥물은 끓어 넘치는데 아이들은

밖으로 나가는 열쇠가 없어

울고 서 있었다

생각을 일으켜야겠는데

오래 입은 옷들이

발을 걸었다 호호호

내가 네 엄마가 맞단다

어서 문 열어주렴 꽁꽁 닫힌

문 속으로도 언제나 불쑥

들어와 있던 엄마가

베란다 바깥 허공을 따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는 엄마를 붙잡아야겠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엄마가 내 소리를 파먹은 게 분명해

거실에 넘어졌는데

눈 뜨니 부엌이었다

밥물은 끓어넘치는데

오래 입은 옷이 열쇠를 흔들며

호호호 웃고 있었다. 돌아보니

마흔이었다

 

 

[프로필] 유정이 : 천안, 동대 대학원 국문과 박사 과정 수료, 시집 <내가 사랑한 도둑> 외 다수

 

시 감상

분명히 어제 설날이라 설빔을 입고 놀았는데, 엊그제 아이가 태어나 백일이라 잔치를 했는데, 어제 대학 새내기 그녀와 첫 미팅을 했는데, 첫 월급을 타서 기분 좋게 친구들과 한 잔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부모님 내복을 사 왔는데, 어제 비가 왔던가? 눈이 내렸던가? 아침에 자고 깨 보니 불혹을 넘어 미혹이다. 산다는 것은 나도 모를 사이에 드라마가 상영되고 종영되고 다른 드라마의 첫 회가 시작되는 드라마 속이다. 물론 나는 무심한 시청자일 뿐. [글/김부회 시인, 평론가]

 

 

저작권자 © 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