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 철학교수)

진서우 여행작가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나는 베란다 안으로 쏟아지는 햇빛에 힘없이 얼굴을 기대었다. 브룬펠지어 재스민이 눈에 들어왔다. 진한 향기가 매혹적이던 재스민이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지난날 우리 집 거실과 베란다 정원에는 이백 개가 넘는 화초가 있었다. 언제부턴가 돌보지 않는 정원 구석에는 빈 화분이 폐허처럼 쌓여갔다. 베란다 정원을 둘러보니 여기저기 화초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병색이 짙은 재스민 앞에서 한참을 울었다.

쉰두 살을 지나오면서 나는 몹시 위태로웠다.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안주하면서 몸에 곰팡이가 피는 줄도 모르고 먼 길을 왔다. 내 품을 벗어난 아이들은 생각하는 틀도, 살아가는 방법도 나와 달랐다. 스물두 살에 만난 남편은 늦깎이 시인의 길을 걸으면서 자기만의 세상을 넓혀갔다. ‘우리의 영역’이라고 생각한 공간에서 내가 사라진 것이다. 남편도 아이들도 타인이었다. 불행은 다른 모습으로도 다가왔다. 나를 잃어버리고 살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절망도 컸다.

불행한 나날을 보내던 그때, 백세 철학자 김형석의 문장이 내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불행한 경험은 손해가 아니다. 그리고 사람은 배우고 성장하는 한 늙지 않는다.’ 돌이켜보니 불행은 내게 절망만 안겨준 것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 멀리했던 책을 가까이 두며 글을 쓰게 되었고, 스스로를 가두었던 울타리를 벗어나 세상의 문을 열고 나갔다. 거리를 두고 바라본 타인들은 재스민처럼 향기로웠다. 자애로운 신이 내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해도, 나는 결코 불행했던 시간을 지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 불행이 나를 돌아보게 하고, 성장하게 했기 때문이다. 거창한 목표를 세우진 않겠지만 나는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할 것이며, 나와 타인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생각하며 실천할 것이다.

<구성 : (사)한국문인협회 김포지부 고문 이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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