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형
안동대학교 명예교수

오는 주일(12일)은 부활절이다. 부활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살아나신 것을 기념하는 특별한 날이다. 인간(예수)의 부활은 인간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으로, 기독교를 제외하고 이런 교리를 제시하는 종교나 사상은 없다. 실제로 인간 자신은 부활할 수가 없다. 그래서 기독교는 예수를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부활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불멸의 존재이므로 부활할 필요도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학의 교리는 예수를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신인(神人)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런 논리는 합리적이지도 않고 현실적이지도 않는 모순 중의 모순 곧 역설(paradox)이다! 

기독교의 역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예수는 출생부터 조건이 달랐다. 그는 정상적인 남녀부부관계를 통해 태어나지 않고 동정녀(숫처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이 잉태되어 난 순진무구한 존재라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므로 죄의 씨로 태어난 사람은 다 죄인이 될 수밖에 없으니 그 죄성을 제외시키는 신학적 장치인 셈이다. 동정녀 출생의 가능성은 유전자 조작으로 무성생식이 실현된 오늘날의 상식으로 약간의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합리성은 이를 수용하지 않는다. 또 하나님은
한 분이나 그 위격(person)이 다른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론도 단순 수리를 어지럽히는 역설이다. 한 분 이면서 세 분의 위격, 이것은 종교재판에 의해 정설로 채택되면서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삼위삼체론을 밀어내 었다.

이런 역설적 교리를 신봉하는 기독교가 여태 잔존한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다. 이 인식은 기독교 초기에도 공유된 사실이다. 그래서 당시 유대교, 로마법, 그리스 철학에 정통했던 성경 저자인 바울은 그리스도론을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했다. 이런 불합리하고 모순된 교리가 세계를 제패한 문화가 된 것 또한 역설에 해당한다.

기독교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의 위대함을 자기 자신의 나약을 깨닫는 것이라고 했다. 인간의 발전은 한편으로는 이 나약을 인정하는데서 출발 한다. 바깥의 경험이나 이론적 지식은 약함을 발견하여 보완하면 진일보 할 수 있다. 그러나 비약적 발전은 자기의 무지에 맞닥뜨려 그것을 초월할 때 비로소 생겨난다. 나아가 무지는ㅡ모순과 역설을 만날 때 비로소 바로 파악되고 극복된다. 자가당착 혹은ㅡ역설은 따라서 우리의 무지를 타파하는 길라잡이이다.

기독교의 역설에 반기를 든 사람들은 많았다. 그 중에는 니체와 같은 철학자를 비롯하여 생물학자 과학자 심지어 신학자들도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천재들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합리성을 배반한 기독교의 역설을 견디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역설을 공격하면서 가진 그 자신감 뒤에 오만한 무지의 진지를 구축하였다. 공고한 무지는 인간의 오만과 지식의 권위주의를 기생시키는 정신의 암 덩어리이다. 천재 무신론자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오만과 편견 안에 똬리를 튼 이 무지를 은폐하느라고 자신들의 삶을 허비하는 우를 범했다. 인식의 자기면역질환에 걸린 것이다. 반면 역설을 안은 기독교는 가난하고 약하고 늙고 병든 자들을 위로하는 일에 쏟으며 세계 곳곳으로 순례의 행진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것 또한 역설이 아닌가!

기독교는 이런 역설을 통해 우리의 잘남을 꺾고 자신을 죄인이라고 가르친다. 죄인은 무력하므로 그 죄를 담당하려고 하나님 자신이 이 땅에 온것(성육신)이 예수이고, 죄를 사하심이 예수 십자가의 대리 죽음이고, 그것을 넘어 우리를 하나님의 양자로 삼으면서까지 우리를 바꾸는 의식이 부활이라고 말한다. 이런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어처구니없는 기독교의 도덕을 낳았다.‘ 높아지려면 남의 종이 되어야 하고, 이웃을 자신만큼 아니 원수도 사랑하라.’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이 황금률은 현대의 새로운 리더십으로 자리를 잡아간다. 역설의 정점이다.

독선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지배자 문화가 상식과 합리로 가장한 무지와 오만을 포기하고, 새로운 인간 이해를 세우기 위해 부활절의 모순과 역설은 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 부활절에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극복하고 새로운 자신과 사회 그리고 미래의 인간을 위해 모순과 역설이 주는 기독교의 역사적 의미를 새로운 인생 이정표로 삼아보자. 새로운 변화는 우리에게 닥친 모순과 역설을 새로운 각도에서 풀어낼 때에 오는 것이니까. 누구에게나 부활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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