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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연중기획>한강하구 접경지역 마을이야기(7) - 고양1·2리
류지만
前 김포문화원장

고양1·2리


① 땅이름 :

고양리의 옛 땅이름은 원모루나루로 고양개 또는 고양포라고 불리기도 했다. 마을 뒤에 봉수대가 있는 남산이 180.2m의 높이로 마을의 진산이었기 때문에 고양(高陽)이란 땅이름이 생긴 것 같다. ‘다른 곳 보다 지대가 높아 아침에 해가 일찍 뜨고 저녁에 늦게 진다’고 하여 생긴 땅이름이라고 하나 고(高)는 높다·크다는 뜻이고, 언덕이 높은 것을 양(陽)이라고 하므로 ‘높은 산마을’이란 뜻으로 보면 되겠다.

② 무안대군(撫安大君)의 사패지(賜牌地)

지금 고양1리인 능동마을 일대는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일곱 번째 아들인 무안대군에게 하사한 땅이었다.

태조는 여덟 아들을 두었는데 첫 번째 왕비 한(韓)씨와의 사이에서는 여섯 아들을 낳았고,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 강(姜)씨 사이에서는 일곱째 아들 무안대군 이방번(李芳蕃)과 여덟째 아들 의안대군(宜安大君) 이방석(李芳碩)을 두었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후 세력의 중심에는 다섯째 아들 이방원과 정도전 등이 있었고 서로 견제하는 사이로 세력다툼이 심했다.

1392년(태조 1;壬申) 9월 7일(음력 8월 20일) 태조는 신덕왕후의 요청과 정도전 일파의 추천으로 8남 의안대군을 조선왕조 첫 번째 왕세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품은 이방원이 1398년(태조 7;戊寅) 음력 8월, 정도전을 비롯한 반대세력이 자신을 비롯한 한씨(韓氏)소생 6형제를 음해하려 한다는 구실로 정도전 일파를 모두 주살하여 왕권을 평정하였다.

이 때, 왕세자 의안대군(이방석)을 귀양 보냈는데 귀양지로 가는 도중에 피살되었다. 이 날이 1398년(태조 7;戊寅) 10월 6일(음력 8월 26일)로 당시 왕세자 의안대군의 나이는 17세였다.

이 난을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이방원의 난’ 또는 무인정사(戊寅定社), ‘정도전의 난’이라고도 한다. 이방번은 왕세자인 아우 방석이 죽음을 당하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나머지 사패지가 있는 통진으로 몸을 피하고자 통진를 향하여 오던 중 양화진(楊花津)에서 이방원 일당에 의해 피살되어 고양리 산32번지에 묻혔다. 그 후 태조의 7남 무안대군 이방번(李芳蕃)의 묘가 있다하여 이곳을 능동(陵洞)이라 불러왔다. 무안대군의 묘는 후에 광주로 이장했다.

세종조에 제1차 왕자의 난으로 희생된 무안대군이 후사(後嗣)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세종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1425.5.2~1444.12.7.)를 이방번의 양자로 입적시켜 대를 잇도록 했다.

광평대군은 아들 영순군(永順君)을 두었고 영순군은 남천군(南川君), 청안군(淸安君), 회원군(會原君) 세 아들을 두었는데 능동에는 주로 청안군과 회원군의 후손들이 500여 년 집성촌을 이루어 세거해 오고 있다.

무안대군의 부인 왕 씨는 고려왕실의 종친인 왕 우의 딸로 왕자의 난 후 유배되었는데 태조의 청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태조를 가까이서 보필하며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③ 원머루나루 :

안말 서쪽 염하에 접해 있는 포구마을로 원모루, 원포, 원동 등으로 불리는 어촌포구이기도 했다. 예전에는 화도를 왕래하는 나룻배도 있었으며 어촌이므로 1년 중 첫 출어하는 정월에는 뒷산 당목에서 용왕제도 지내왔으나 개신교가 들어오면서부터 미신이라고 하여 당목도 베어 버리고 용왕제도 중단했다고 한다.

④ 용에머리 전설 :

진자메 남쪽 용머리산 아래의 마을로 용두, 용두동으로 부르는데 그 곳에 집을 짓고 살면 3년 안에 망한다고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⑤ 진자메 :

진(鎭)과 자(城) 뫼(메)는 산의 고어로 ‘성이 있는 산’이란 순수한 우리땅이름이다.

김포신문  gimpo12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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