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지만 
前 김포문화원장

용강리

(1) 땅이름 : 본래 현 용강리 판도(版圖)안에는 흥룡리(興龍里)만 있다가 조선조 말기에 조강 강변포구 쪽을 중심으로 강녕포(康寧浦)라는 법정리가 생겼다.
그 후 1914년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흥룡리와 강녕장를 합하고 두 개의 법정리에서 한 글자씩을 잘라내어 용강리(龍康里)라는 지명을 만들었다. 흥룡리의‘ 용(龍)’자와 강녕포의‘ 강(康)’자를 합쳐 용강리가 되었으므로 별다른 의미는 없다.
용강리에는 옛 포구와 관련된 땅이름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젓갈을 저장했던 곳 젓갈마당논, 선박용 밧줄을 손질하던 곳 줄마당논, 고기잡이 그물을 손질하고 갈물을 드리던 곳 갈마당논 등과 같이 옛 정서를 담고 있다.

② 용못(龍淵) : 용강리에는 용이 승천했다는 연못이 있어 사철 맑은 물을뿜어내고 있다. 옛 날에는 가뭄이 들면 현감이나 부사가 이곳에 와서 금식을 하고 용왕에게 비가 내리기를 비는 기우제를 지냈다. 이곳 용강리는 이 용못 덕에 풍부한 물로 매년 풍년농사를 짓고 있다. 용못이 있어서 그런지 용과 관련된 민속이 담겨 있는 것 같다.
문수산 정상에서 용강리로 뻗어 내린 산줄기에 흥용사와 용호사가 있었다. 이름에 용이 들어 있다. 이름부터 그렇고 그 절터에 아직도 손절구가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용의 기운이 서린 것 같기도 하다.

③ 이계월과 이기울 : 옛 강녕포 하면, 고려 때의 명기 이계월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강녕포나루가 있을 때에는 용강리에 가는 것을‘ 이기울 간다’라고 했다.
고려 말 풍류에 능하고 미모가 뛰어난 이계월이 살았기 때문이다. 이계월은 고려가 망할 때 개경에서 영정포구를 거쳐 조강 건너 김포 강녕포구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그리고 몰락한 선비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시문에 깊이가 있고 아름다운 이계월을 만나기 위해 한양에서 수많은 문객들이 줄을 이어 찾아 들었고, 이계월은 재물이 생기면 모두 이웃을 돕는데 썼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선행이 널리 소문이 났고, 어느 날, 그가 세상을 뜨자 동네 주민들이 예를 갖추어 그를 장사지내 주었다고 한다. 즉 이계월이라는 이름이 하도 유명하여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어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이계월이 이기울’로 변한 것이다.
지금도 용강리 쐐기부리에는 이계월의 묘라고 전해 오는 고총이 있는데 누군가가 매년 벌초를 하여 관리하고있다. 가끔 문인들이 이곳을 찾아 이계월을 추모하는 시 낭송 모임을 갖기도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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