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형 
안동대학교 명예교수

지난 주말 같은 직장에서 30년 교수로 동고동락하던 세 친구 부부가 모임을 했다. 학맥은 달랐지만 한 날 한 시에 교수가 된 사람 중 부부들과 애들의 나이도 비슷하고 같은 급료를 받으니 생각이 같아 자연스레 의기가 투합한 모임이었다. 다만 셋은 전공분야만 달랐다. 자연과학을 한 친구는 아버지의 고향인 충청도로 낙향하여 ‘교수에서 농부로’ 변신을 했다. 한 살 위인 그를 나는 내심 외우(畏友)로 삼아왔는데, 매사에 합리적인 사고를 한 뿐만 아니라 삶에서 변화를 늘 추구하는 실용주의 과학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듣는다. 누구와 만나도 먼저 너스레를 뜨는 법이 없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빙그레 웃으며 짧은 말로 응대를 한다. 뿐더러 스토리가 형성되지 않는 이야기는 육하원칙으로 부드럽게 사실을 확인한다. 이런 자세로 교무처장과 대학원장 직무를 수행하자 그는 많은 사람에게서 ‘말뚝체질’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반면에 그는 흡연과 신앙에 대해서는 의외로 고집이 세었다. 그러나 귀향 3년 차인 그는 아내의 부탁으로 교회를 나가 세례까지 받았고, 불원간 금연까지 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치는 것을 보고는 역시 부드러운 멋쟁이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날씬해진 몸매와 맑아진 얼굴로 즐겁게 사는 그를 보며 변화를 즐기는 고결한 인간의 모습을 배운다.

친구의 고상함은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며 열린 마음으로 자신을 변화시켜가는 자세로부터 나온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경직과 소란과 소요는 세상과 사물을 정지된 것으로 보고, 또 내가 그것을 틀림없이 알고 있다는 독단에서 비롯된다. 일찍이 그리스에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라는 철학자가 있었다. 그는 ‘만물은 흐른다’고 주장했다. 세상 모든 것은 돌고 돌기 때문에 잠시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과학에서 여태 밝혀진 바로서 이것은 사실이다. 다만 유일하게 불변하는 것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법칙 그 자체라고 했다. 우리의 상식과는 정반대이다. 우리는 말과 달리 마음으로는 눈에 띄는 물질은 불변적으로 존재하고, 법칙은 보는 사람들이 가변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물질을 얻기 위해 이전투구를 일삼는다. 현재 한국의 사회상이 매우 그러하다.

만물은 생성소멸을 겪는다. 생성은 없는 것이 있는 데로 가는 과정이고(오르막 길), 소멸은 있는 것이 없는 데로 가는 과정이다(내리막 길).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면 무(無)이고, 거기에서 있는 데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유(有)가 된다. 없는 것이 하나도 없는 있는 것은 어떤 존재가 드러나는 절정이다. 그러나 이 절정은 어느 새 없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만물의 생성소멸은 끊임없이 이어지기에 우리는 그것을 마치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는데 이것은 법칙을 알아보는 우리의 이성(理性)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의학상식이 없는 우리는 우리 피를 같은 것으로 보지만 넉 달만 지나면 완전히 새 것으로 바뀐다. 모든 만물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법칙을 알고, 동시에 그 법칙은 불변하다는 사태를 깨닫는 것을 우리는 지혜라고 한다. 이것을 거꾸로 알거나 한 쪽만 아는 자는 미련한 사람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만물의 변화의 사태를 감지하여 변화를 계속하는 사람이다. 우리나라는 4계절이 있어서 그때마다 옷을 바꿔 입어야 한다. 치기가 넘치는 사람이 여름에 겨울옷을 입고 겨울에 여름복장을 한다면 그는 제대로 생활을 할 수 없고 죽을 수도 있다. 신고속도로 생긴 것을 식별 못한 산짐승은 죽음을 피할 수가 없다. 지나친 개발과 거기 따른 실질적 대처 문제는 논외로 하고, 이런 사고들은 변화를 무시한 생물의 극단적 대처사례이다. 지난 주 화요일 병원에 늘름하게 걸어 들어가신 필자의 장인어른께서 수요일에 작고하셨다. 처가의 형제자매들은 안타까움에 눈물을 쏟았다. 변화는 준비를 동반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헤라클레이토스는 생성소멸의 이유를 말하면서, 생성은 사랑이, 소멸은 미움이 주도한다고 덧붙인다. 모든 것을 생성시키는 아름다운 변화를 위해서는 그것을 파괴하는 미움을 버리고 사랑을 수용하라는 또 다른 충고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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