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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연중기획>한강하구 접경지역 마을이야기(2) - 원산3리
류지만 
前 김포문화원장

(1) 땅이름 :

지금의 원산리 지역은 원래 원통리(元通里)와 등산리(登山里)로 불리다가 일제강점기인 1914년 전국의 행정구역을 폐합하면서 원통리 의 ‘원(元)’자와 등산리의 ‘산(山)’자를 한자씩을 취하여 합성하여 만든 땅이름이기 때문에 땅이름 자체에는 별 의미는 없다.

그러나 원산1리인 원통, 2리 등산동, 3리 연화로 구분되어 있는 옛 지명은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고 있다.

① 원통동 : 1993년에 간행한 <김포군지>에 따르면 “고려조 충신 송산공(宋山公) 조견(趙狷)의 손자 식(軾)이 이곳에 처음 입향하여 살면서 송산공이 숨어 살던 광주 청계산의 원통동(元通洞)을 모방하여 같은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고 유래를 이야기하고 있다.

또 1530년(중종 25;庚寅)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 통진현 편에 한문표기는 각각 달라도 ‘원통사(圓通寺)가 동성산에 있다’는 기록을 보면 ‘원통’이라는 땅이름이 오래전부터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元)이 대(大), 머리(首), 임금(君)의 뜻이고, 통(通)은 훈(訓)이 달(達)이므로 달이 산(山)의 뜻이기 때문에 ‘큰산마을’의 뜻이 된다. 아마도 동성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이런 땅이름이 생긴 것 같다.

 

② 등산동과 연화동 : 1783년에 작성된 평양 조씨문중 가승(家乘)의 지도에 이 마을이름을 ‘연아곡(延阿谷)’이라 표기하고 있는바 연아곡〉연화곡(동)이 된 것 같다. 연(延)은 ‘길게 늘어지다’의 뜻이고 아(阿)는 ‘언덕’의 뜻이므로 ‘길게 늘어진 언덕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 연아곡, 연아동이라는 지명이 생기게 된 것 같다. 낮은 구릉이 길게 이어져 이런 지명으로 불러온 것이다.

후에 다른 한자표기로 ‘산등마루에 퍼져 있는 마을’이라는 같은 뜻으로 등산동으로 고쳐 표기한 것 같다. 연화동은 연아동과 음이 비슷하여 미화한 것일 뿐이다.

 

③ 장터거리 : 연화동과 등산동 사이 능선일대에 예전에 장(場)이 섰기 때문에 붙인 땅이름이다. 1842년(헌종 8;壬寅), 간행된 <통진부읍지>에 원통리장(元通里場)이 부(府)의 동쪽 10리에 있고 매 순(旬) 4일과 9일에 열린다고 기재되어 있다.

 

(2) 조정익(趙廷翼)과 예안(禮安) 이씨정려(李氏旌閭)

원산리는 500여 년 전에 평양(平壤) 조씨(趙氏) 식(軾)이 입향하여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세거해 왔고 지금도 30여 호가 거주하고 있다. 이 문중 조정익의 처인 예안이씨 정려각은 지금 하성면사무소에서 통진쪽으로 1Km 쯤 가면 우측에 약수터로 올라가는 산길이 나오는데 이 길을 따라 150m 정도 들어가면 묘안산(원산리 산 2번지) 평양조씨묘역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조정익(1599년 선조 32;己亥~1636년 인조 14;丙子)은 고려의 명신 조인규(趙仁規)의 10세 후손으로 아버지 조인(趙寅)과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통진부 원통이다. 자는 익지(翼之), 호는 낙도재(樂道齋),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1737년(영조13;丁巳)에 통훈대부전행병조정랑(通訓大夫前行兵曹正郞) 조정(趙정)이 쓴 묘갈명(墓碣銘)과 김포군지를 상고하면 조정익은 깨끗한 얼굴과 아름다운 수염을 가졌었다는 기록처럼 용모가 단정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아버지의 엄한 계훈에 따라 학문과 무예를 연마하여 문무를 겸전한 3시(문무사마시, 문무중시, 문무전시)에 장원급제한 영재였으며 둘째 아우 정준(廷俊)과 함께 3년간 여묘살이를 같이 하여 인묘조(仁廟朝)가 그 효성에 감복하여 사미부호(賜米復戶)를 내렸다. 그러나 조정익은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았으며 참다운 선비로서 지킬 바를 다 하였다.

1636년(인조 14;丙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족을 이끌고 강화도로 피난하였으나 강화도에는 부패한 관군으로 가득 찼을 뿐 전투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더하여 청군이 수전에 약할 것이라고 경시한 나머지 수수방관하고 있던 차에 청군이 염하를 건너 강화성을 급습하여 강화성이 함락되었다.

이 즈음에 조정익은 부인에게 선비는 살아야 할 때와 죽어야할 때를 가릴 줄 알아야 하고 백의종군하여 이제 죽을 때가 되었다고 말하고 패도(佩刀)를 뽑아 자결하려 하니 부인 이씨가 그 칼을 빼앗고 이르기를 ‘당신이 죽은 뒤에 외톨박이 이 계집은 어떻게 혼자 산다는 말이오’하고 칼을 들어 먼저 자결하였다. 부인 이씨는 적에게 능욕을 당하기보다 남편 앞에 죽음이 옳다고 남편의 칼로 할복한 것이다. 조정익은 부인의 주검을 수습하고 난후 나이 어린 외아들에게 훈계하기를 “너는 우리집 독자이니 자손을 잇고 선대의 제사를 받드는 것이 효도이다”하고 선대의 세계(世系)를 써서 옷깃에 넣어 주고 남자종에게 부탁하여 잘 숨어 지내도록 하라고 하고는 조용히 자결하니 향년 39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부인 이씨는 본관이 예안으로 부총관 이준(李濬)의 딸이다. 부덕이 정숙하여 시부모를 정성으로 섬기고 남편을 받들기는 예로서 하여 안팎이 화목하니 친족들이 기뻐하고 심복하였다. 난리가 끝난 후 두 아우가 형과 형수의 시신을 통진의 동성 서쪽 간좌원(艮坐原)에 장사지냈다. 이곳이 지금의 평양 조씨 묘역이다.

통진 유림들의 상소로 조정에서는 난리에 다 달아 순절하였다하여 조정익에게 좌승지를 증직하고 부인에게는 숙부인(淑夫人)의 가좌가 내렸으며 정려도 세워 주었다.

그 후 1758년(영조 34;戊寅) 부인에게는 증정부인(贈貞夫人), 부군에게는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를 증직하고 충숙(忠肅)이란 시호가 내려 졌고, 예안이씨에게는 열녀정문(烈女旌門)이 내려 졌다.

원산리는 충과효의 고장임을 강조하고 싶다.

김포신문  gimpo12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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