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형 
안동대학교 명예교수

요즈음 자주 듣는 말이 ‘팩트 체크!’(사실 확인)다. 물론, 하도 가짜 소식fake news이 판을 치는 세상이니, 직접 현장에서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현장으로 가면 무엇인가 뚜렷한 한 가지 사실이 있을 것이고, 우리 모두는 그 사실을 만나리라는 기대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만나는 현장은 사실을 기대만큼 깔끔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한 가지 예로, 이명박정부의 ‘4대강 유역 댐 공사’를 두고 문재인정부와 사이에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쟁점 중 하나는 댐의 보가 강을 오염시켰는지 여부였다. 사실 확인을 위한 평가단이 양 정권의 구성원들로 꾸려졌다. 현장에 도착한 평가단의 입에서 놀랍게도 이구동성으로 같은 말이 터져 나왔다. “봐라, 우리말이 맞지?” 그런데 가리킨 내용은 달랐다. 각자의 입장을 내세웠고, 싸움은 아직 여전하다. 문재인정부는 자기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고 천문학적 세금으로 만든 보를 천문학적 예산을 들여 부수려다가, 이번에는 주민들의 반대로 엉거주춤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런 일탈은 국가사업에 부지기수다. 원인은 국가의 운영을 책임진 정치지도자들의 식견이 유치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담론 수준은 젓가락이 꽂힌 물 컵을 보면서 한 쪽은 똑바르다고, 다른 쪽은 굽었다고 죽기 살기로 싸우는 어린이의 모습과 흡사하다. 이런 어린이는 우선 물체는 밝은 곳에서 물과 같은 액체를 통과할 때 그것이 굴절되어 보인다는 물상지식을 터득할 필요가 있다. 또 우리의 눈을 포함한 감각기관이 빚어내는 오류를 인지함으로써 각자의 지각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남은 나의 절대적 앎을 전파할 대상이 아니라, 나의 부족을 채워 더 나은 앎을 만들어갈 동료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 사실 확인의 내용과 기준이 무엇인지 그 결과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합의하는 건강한 상식을 갖추게 될 것이다.

이런 합리적 태도를 기르는 한 편, 어떤 주장이 참(진리)이 되는 근거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흔히 우리는 ‘안다’‘참이다’라고 하는 사태가 진리가 되려면 세 가지 조건 중 한 가지를 충족해야 한다. 예컨대, ‘김포는 경기도에 있다’는 주장은, 그 사태가 현실 속에 존재해야만 참이 된다. 실제로 김포는 경기도에 있다. 따라서 이 사태는 참인 사태(사실)이다. 이런 주장을 일치설이라고 부른다. 만일 ‘김포는 경기도에 있지 않다’거나 ‘김포는 강원도에 있다’는 주장은 김포가 경기도에 있다는 사실과 일치하지 않으므로 거짓(참이 아님)이 된다. 이런 해석은 사실 확인을 바로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둘째로 ‘2+2=4’라는 기초적 수학적 규칙이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20+20=50’이라는 주장을 한다면 이것은 사실(진리)이 아니다. 진리가 아닌 이유는 기존의 수학 규칙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정합설이라고 부른다. ‘신은 여자의 꽁무니를 좇고, 범죄를 밥 먹듯이 하고 무식하기 짝이 없다’라는 주장도 기존의 신(완전한 존재) 관념과 부합하지 않음으로 거짓이 된다. 그래서 심지어 니체같이 위대한 철학자의 사상도 신을 격하시켜 말하는 부분은 아직도 이단아로 취급받을 뿐이다. 그래서 솔로몬과 같은 지혜의 임금이 ‘이 땅에 새로운 것이란 없다’고 말하고 불교에서는 윤회설을 말하는지도 모른다.

셋째로 자연과학에서 진리는 실험의 결과로 나타난다. 뉴턴 이전에는 지구에 ‘모든 물체는 아래로 떨어진다’는 진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이 블랙홀을 상상하여 ‘빛이 굴절한다’고 한 주장은 망원경으로 태양을 관찰하여 확정하기 전에는 잠꼬대에 불과했다.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을 받아들이는 것도 모험이었지만, 상대적 공간과 시간을 현대의 인문학, 사회과학의 도움을 받아 과학에 적용시켜 사실로 검증하기까지 자연과학의 진리는 상대성을 포함하지 못하였다. 이 모든 새로운 자연과학의 사실은 실험을 통해 진리가 된다. 이런 입장을 우리는 실용주의적 진리관이라고 부른다.

이제 우리는 사실 확인을 할 때, 어떤 토대에서 사실을 논할 것인가를 서로 동의하고 나서, 진리를 확인하는 절차를 밟는 여유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럴 때 바른 사실 확인이 이뤄질 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실을 바늘귀에 꿰어서 써야지, 바늘허리에 묶어서 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공정한 논의는 절차를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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