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광식
전 김포대 총동문회장
전 파독광부협회 회장
전 경기도의원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약칭, 공수처) 설치법이 12월 30일 국회 본회의에서 최종 가결됐다. 공수처는 고위공직자 및 그 가족의 비리를 중점적으로 수사·기소하는 독립기관이다. 공수처 설치를 놓고 논란이 분분했던 당시에 나는 요즘 젊은 세대한테는 좀 낯선 이름일지 모르나, TV극을 통해 익숙하게 알려진 ‘판관 포청천’을 떠올렸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기억하고 있지만, 당시 매주 금요일 늦은 밤 11시에 방송되던 날은 외출했다가도 서둘러 돌아와서 TV앞에 앉았다. 정확한 시청률은 모르지만 안 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선풍적 인기였다. 중국 북송 시대를 배경으로 수도인 개봉(開封)에서 부윤으로 재직했던 포청천의 이야기를 극화한 것인데, 시청자들은 ‘판관 포청천’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와 전개에 박수치고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백성의 재산을 가로채고 괴롭히는 탐관오리를 단번에 척결하는 것을 보고 희열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TV극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작두를 대령하라”였다. 작두는 무시무시한 형벌기구로 신분에 따라 왕족은 용 작두, 귀족은 호랑이가 새겨진 호 작두, 평민은 개 작두를 사용했다. 어떤 범인은 자신이 왕족이라는 이유로 용 작두에 죽기를 원하나, 포청천은 단호하게 ‘개 작두를 대령하라’고 호통친다. 법 앞에는 모든 사람이 평범하면서도 특권층에게는 엄격함을 더해 가중처벌을 하는 모습을 확인 할 수 있었다. TV로 방영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시간을 초월하여 여전히 신선한 감동을 던지고 있는 ‘판관 포청천’을 다시 보고 싶은 것은 흔들리고 원칙이 무너지는 시대에 정의를 향한 국민의 간절한 염원이 ‘판관 포청천’에서 극화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서이다. 공수처가 이런 역할을 다할 수 있을지 기대 반 우려 반이다.

 

북송 진종 함평 2년(999)에 태어난 포청천은 지난 천년 동안 중국대륙에서 가장 명망 높고 존경받는 ‘청렴강직’의 대명사였다. 황제 얼굴에 침이 튀길 정도로 집요하게 간쟁하며 탄핵한 불굴의 강직성, 현명하면서 엄격한 재판과 법집행으로 조정과 지방 모든 관리들을 공포에 벌벌 떨게 만든 ‘철면(鐵面)어사’였다. 실제 모습이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찌나 무서웠던지 검은 호랑이(黑虎)를 형상화한 ‘검은 얼굴(흑검黑臉)’로 잘 알려져 있다. 별명호칭인 ‘청천(靑天)’은 구름 한 점 없고 미세먼지도 없이 맑고 푸른 하늘이니, 바로 청렴한 정신과 청정한 마음을 상징한다. 과연 그는 이름이나 자나 별호에 모두 걸맞게 명실상부한 삶을 살았다.

 

포청천은 문학가도 시인도 아니었다. 훗날 그를 위해 편찬한 <포증집>에는 그가 조정에 올린 글 171편, 가훈 1편, 그리고 오언율시 1편이 실려 있다. 가훈에서는 특별히 탐욕에 대한 경계를 강조하고 있는데, “후손들 가운데 관리가 되어 뇌물 수뢰 등으로 죄를 지은 자는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고, 죽은 뒤에는 가족무덤에 묻히지 못하게 하라.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내 자손이 아니다”라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오언율시 한 수는 자손을 비롯한 세상 사람들에게 청렴하게 생활할 것을 권유하는 내용이다. ‘깨끗한 마음을 다스림의 근본으로 삼고, 바른 길을 몸소 실천한다. 가지를 다듬어 마침내 기둥을 이루고, 좋은 강철을 낚싯바늘로 쓸 수는 없는 법. 창고가 넉넉하면 제비나 참새도 기뻐하고, 풀이 다 떨어지면 여우와 토끼가 시무룩해한다. 역사책에 유언을 남기니 후손에게 부끄러움 없도록 하리라.’ 요컨대 정직하고 깨끗하게 살라고 권유하는 내용인데, 그런 사람만이 나라의 기둥이 될 수 있고, 쥐새끼나 개처럼 남의 것을 훔치지 않아야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다는 것이다. 역사상 위대한 시인들은 아름답고 귀중한 시를 많이 남겼다. 그 중에는 산천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도 있고, 뜻있는 인물이나 영웅호걸을 찬양한 것도 있다. 그러나 이 시처럼 탐욕을 경계하고 청렴을 제창하여 이제 막 관직에 들어선 관리들이 좌우명을 삼을 수 있는 시는 찾아보기 어렵다.

 

당시의 포청천이 다루었던 대표적인 재판의 판결내용을 살펴보자. 첫 번째 이야기. 양주(揚州) 천장(天長) 현감에 부임하자마자, 어떤 사람이 자기 집에 도둑이 들어 소의 혀만 잘라간 해괴한 일이 생겼다고 신고해왔다. 이에 포청천은 그 사람에게 집에 돌아가서 그 소를 잡아 고기를 주민들에게 팔라고 지시하였다. 농경사회에서 마소는 농경운송을 전담하는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이기 때문에 엄격히 통제하였다. 당송 대에는 남의 마소를 고의로 죽인 죄는 징역 1년 반, 주인이 자기소를 잡은 경우에도 징역 1년에 처할 정도였다. 소 주인은 포청천이 시킨 대로 소를 잡아 팔았는데, 과연 임의로 소를 도살했다고 신고하는 자가 있었다. 이에 포청천이 “어찌하여 남의 소 혀를 몰래 잘라 놓고서, 그 소를 잡는다고 신고하느냐?”고 호통을 치자, 그 도둑은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죄를 스스로 실토했다. 두 번째 이야기. 두 사람이 술을 마시는데, 한 사람은 술을 마실 줄 알고, 다른 한 사람은 잘 마시지 못했다. 술 마실 줄 아는 사람은 소맷자락에 금을 몇 냥 지니고 있었는데, 술에 취해 빠뜨려 잃을까 두려워하여, 이내 금을 꺼내 술 마시지 못하는 사람한테 맡겼다. 나중에 술 마신 사람이 술에서 깨어 금을 돌려달라고 찾자, 술 마시지 못한 사람은 금을 맡은 일이 없다고 시치미를 뚝 뗐다. 이에 금 주인이 소송을 벌여, 포공이 신문하였으나 끝내 승복하지 않고 버텼다. 포공은 은밀히 관리를 불러, 금을 숨긴 자가 집안 식구한테 금을 보내라고 분부하는 것처럼 꾸민 내용으로 서신을 적어, 그 문서를 갖고 그 집에 가서 내밀게 했다. 그 집안 식구는 일이 들통 난 줄 알고 곧바로 금을 관리한테 내주었다. 이에 관리가 금을 갖고 관가에 돌아와 보고하자, 금을 숨긴 자는 대경실색하며 마침내 승복하였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나라에는 포청천같은 참다운 인물이 없을까? 우리에게도 포청천의 닮은꼴, 포청천의 분신, 포청천의 그림자 정도라도 되는 걸출한 인물이 없지 않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는 인생의 참 스승, ‘선비’가 있다. 역사의 격랑 속에서 자신의 목숨보다 대의를 더 소중히 여기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 곧 ‘선비’다. 그들은 지조와 절개를 꿋꿋이 지켰으며 눈앞의 권력과 부귀에 연연치 않았다. 언제나 명분과 의리에 따라 행동하고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에 빠질 때면 누구보다 온 몸을 내던졌다. 평상시에는 선현들의 가르침을 본받아 학문과 덕을 겸비하는데 힘썼으며 언제나 겸손한 태도로 사람들을 만났다. 때론 끼니 걱정을 해야 할 만큼 가난했지만 한 시도 여유로운 웃음을 잃지 않았고 남을 폄하하거나 비판하기 보다는 자신을 먼저 돌아볼 줄 알았다. 고결한 선비정신과 번득이는 지혜로 난국을 극복해 나갔던 선현들의 생애를 통해 세상을 보는 안목과 원칙을 포기하지 않는 꿋꿋한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

 

나는 희망의 새싹들인 청소년들, 젊은이들에게 포청천의 발자취를 통해 참 희생, 참 헌신, 참 삶을 일깨우고 싶다. 나는 어수선한 환경에서도 스스로 바로 살고 바로 서려 애쓰는 이 시대의 청장년층을 위해 선비정신을 드높이고 싶다. 내 인생을 이끌어 줄 나침반 같은 참 스승의 생각과 삶과 꿈을 통해 부패와 비리가 없는 참으로 청렴정직이 활짝 꽃피는 대한민국을 기대해본다. 그리고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에 따른 나의 유일한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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