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쇄암리 약수터
▲ ◇돌우물 내부전경
▲ ◇손돌공 진혼제 봉행모습
■ 손돌공 진혼제
위 치 : 대곶면 신안리
시 기 : 1970년 1월 21일
복원
규 모 : 지름 10m 크기의 묘

918년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여 제23대 고종에 이르기까지 314년간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고려는 많은 수난을 겪었다. 1231년 몽고(원나라)가 침입하자 고종은 화친을 내세워 일단 회군시켰으나, 그들이 계속 부당한 조공(朝貢)을 요구하므로 결사 항전할 것을 결심하고 1232년 몽고의 2차 침략 때 강화도로 천도하게 되었다.
고종은 조정을 이끌고 개경을 떠나 사공 손돌이의 배를 타고 예성강 벽란도를 거쳐 임진강과 한강하류를 지나 강화도로 가고 있었다. 고종은 현재의 대곶면 신안리와 강화도 광성진 사이의 해협이 협소하고 급류인 목에 닿게 되었다.
이 곳은 앞이 막힌 듯이 보이는 지형으로 처음 가는 사람은 뱃길이 없는 것으로 착각하기 쉬운 지라, 천도하는 고종도 심기가 불편한 나머지 뱃길도 없는 곳을 향하여 노를 젓는 사공 손돌이를 의심하여 수차 뱃길을 바로 잡도록 하명하였으나, 손돌이 아뢰기를 “보기에는 앞이 막힌 듯하오나 좀더 나아가면 앞이 트이오니 폐하께서는 괘념치 마옵소서”라고 아뢰었다. 고종은 마음이 초조하여, 손돌이의 흉계로 의심하고 신하들에게 손돌을 죽이라고 명하였다. 손돌은 죽음을 앞두고도 임금의 안전 항해를 바라는 충정에서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뱃길이 트일 것을 아뢴 후 참수되고 말았다.
이후 왕의 천도 항해는 손돌이의 바가지 안내대로 험한 협류를 무사히 빠져나와 목적지에 당도하였다. 왕은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손돌을 후히 장사 지내주고 그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사당도 세워주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이 뱃길목은 지금도 손돌의 목을 벤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 부르며, 공(公)의 기일인 음력 10월20일 쯤이면 손돌의 원혼이 바람을 일으킨다고 전한다. 이 때의 거센 바람을 ‘손돌이 바람’, 이 무렵의 추위를 ‘손돌이 추위’라 전해온다.
손돌공의 묘는 물 건너로 광성진이 보이는 덕포진 북쪽 해안 언덕 위에 있다. 공의 제사는 조선시대 말까지 계속 되어오다가 일제 강점 후 중단되었으나 1970년 이후 다시 지내오고 있으며, 묘는 1977년 박일양(朴一陽)씨 등과 면민들이 묘비를 세우고 치산(治山)하여 크게 단장하였다.

■ 돌우물에 전해오는 이야기
위 치 : 대곶면 석정리
시 기 : 조선시대
규 모 : 지름 15m의
둥근 원형

조선시대에 장릉(풍무동에 있는 원종과 인헌황후의 능)을 양주에서 김포로 옮기기 위해 인부들이 구덩이를 파던 중, 갑자기 구덩이에서 샘물이 솟아 나와 공사를 하던 사람들이 놀라 나머지 작업을 중단하게 되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지관(집터나 묏자리를 가려잡는 사람)이 땅 속으로 흐르는 물길을 따라 50여리나 떨어진 이 곳 돌우물의 조그만 샘물을 크게 파헤치도록 하자마자 돌 속에서 엄청난 양의 샘물이 솟구쳐 나오고 장릉에서의 물줄기는 멈추었다.
1797년 무렵 옥과(현 전라도 곡성군) 현감이 이 우물 옆에 살았는데 물맛이 너무 좋아 물을 마시러 오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불편을 느끼고 있던 중, 지나가던 스님에게 묘책을 물어 보았다. 그러자 스님은 “우물 안에 있는 거북 형상의 돌에서 머리를 깨어 버리라”고 했다. 현감이 스님의 말대로 하자 출입객이 점차 줄어들고 현감의 집은 순식간에 망해 버렸다.
바윗돌 위에 군데군데 난 발자국 모양은 옛날 이 마을 뒤 오봉산에 힘센 장사가 살았는데 그가 이 우물에서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 자국, 지팡이 자국, 소변을 보던 자국이라고 전해진다.

■ 쇄암리 약수터


이 약수터는 고려 때 발견된 곳으로 바닷물 속에 잠긴 약수터라 조수의 차에 의하여 약수가 나타났다 물에 잠기곤 한다.
이 약수는 고려 고종당시 몽고족의 침입으로 인하여 왕이 강화로 피난을 가려다 이 곳에 잠시 머물다 임금이 목이 말라 하는데 신하가 갑자기 물이 없어 당황하던 차 이곳 바위밑 개흙이 있는 곳에서 맑은 샘이 신기하게 나와 이 우물의 물을 떠다 임금께 드리니 목이 마른 참이라 물맛이 썩 좋다고 한 유래가 있어 그 후 약물터라 명명하였다.
그 후 이 고장 주민들은 봄이면 이 약수터에 쌀과 미역을 가져와서 이 물로 쌀을 씻고 국을 끓여 먹으면 모든 체증이 깨끗이 가신다고 한다. 또 이 물로 머리를 감으면 비듬이 말끔히 없어지며 상처가 난 곳을 씻으면 깨끗이 낫는다고 한다.
■ 요골 고개의 전설

위 치 : 대곶면 약암2리
전 설 : 진정한 효도

지금부터 약 60년 전 약암2리에 심성택(沈成澤)씨가 살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매일 아침저녁 부모님께 문안 인사를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었다. 심지어는 밤이 늦어 부모님께서 잠이 들었어도 그는 출타를 하였다 돌아오면 잠드신 부모님께 인사를 하고야 잠자리에 들곤 하였고 이튿날은 더 일찍 일어나 아침 문안 인사를 드렸다.
그가 40세에 대곶면장직을 맡고서는 더욱 하루도 거르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도 효성이 지극하던 그가 어느 날 양친을 여의었다. 그의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고 요골 고개 넘어 양지 바른 곳에 부모님의 산소를 마련했다. 그리고 비나 오나 눈이 오나 세찬 바람이 부는 날에도 부모님 묘소를 찾아 문안 인사를 드리느라 그의 무릎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래도 그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부모님 산소에 문안 드리러 가는 것을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엎드려 절하던 산소 앞 양쪽 무릎이 닿았던 자리는 하도 닳아서 잔디가 나오지 않고 그 자리가 패어 있다.

■ 소원을 들어주는 돌부처 ‘미륵당’

위 치 : 대곶면 초원지리

이 마을은 광주이씨 집성촌으로 1820년경, 옛 노인들이 우연히 산에서 미륵당바위를 발견하고 그것의 신비로움을 마을의 여러 사람에게 이야기하였으나 모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날 이 지역유지 이석윤씨의 꿈에 흰 두루마기를 입은 백발노인이 나타나 “너는 미륵당돌부처를 잘 모시면 소원성취할 것이다”라고 말한 후 사라졌다. 이석윤씨는 아침 일찍 일어나, 동생 석명과 함께 부처의 하단부와 상단부를 모셔 놓았다. 그런데 그 다음날 밤에 어제의 백발노인이 다시 나타나서 “너는 어찌 부처의 머리를 잊어버렸느냐. 바로 옆으로 50 발자국만 가서 파면 돌부처의 머리가 있을 것이다. 그 돌부처를 잘 모시도록 하여라”라고 말해, 다음날 아침 노인이 말한 곳에서 돌부처 머리를 찾아내 잘 모셨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20년 가현리 750번지에 거주하고 있던 이인두씨가 딸만 셋을 두고 아들이 없어 늘 근심에 싸여 아들을 소원하던 차에 미륵당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듣고 미륵당에서 동북쪽으로 100m 떨어진 옹달샘에서 목욕재개하고 물을 길어다 밥을 짓고 정한수를 떠놓고 보름 동안 지성을 드린 후 아들을 낳아 충향이라 했고, 2년 후에 또 효향이란 아들을 낳았다. 그리하여 이인두씨는 그 후 정월대보름에 이 미륵당에서 지성을 드리고 이 집을 잘 관리하여 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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