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곶면의 지명유래

대곶면은 대능리, 대벽리, 약암리, 상마리, 율생리, 초원지리, 거물대리, 오니산리, 송마리, 석정리, 쇄암리, 신안리, 대명리 등 김포시에서 가장 많은 총 13개 법정리와 37개 행정리로 구성돼있다. 또한 각 행정리마다 자연부락명이 있고 그 지명에 대한 유래가 있다.

1. 대능리(大陵里)
대파면의 대파리(大坡里)와 능동리(陵洞里)의 2개 리를 병합할 때, 대파리의 대자와 능동리의 능자를 합하여 대능리라 칭하게 됐다.
▲동촌(東村, 동녘마을)
동촌마을 서쪽에는 옛날부터 어모로리(漁毛老里)에 큰 포구가 있었는데 그 포구에 왕래하는 사람들이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동촌이라 불렀다.
▲능동(陵洞, 능골)
옛날에 마을 뒷산에 아기능이 있었다 하여 능골이라 불러왔다 한다.
▲학동(鶴洞, 학당골)
뒷산에 소나무가 무성해 학이 많이 찾아든다 하여 학동이라 부른다는 설이 있으나 옛 이름이 학당골(學堂谷)이라 한 것으로 미루어 옛날에 큰 학당이 있어서 학당골이라 불린 것으로 추측된다.
▲갈마(渴馬洞, 갈마을)
마을 뒷산의 형국이 말이 물을 먹으러 내려오는 모양이나 원래 물이 귀하여 물을 못 먹는다 하여 갈마골이라 불러왔다 한다.
▲함배(含盃)
옛날에 주점이 있었는데 인심이 좋아서 술잔이 후하다 하여 함배라 하였다고 전한다.

2. 대벽리(大碧里)
벽정리(碧井里)와 대촌리(大村里)를 합병할 때, 대촌리의 대자와 벽정리의 벽자를 합하여 대벽리라 칭하게 됐다.
▲벽정(碧井, 벽우물)
이 마을에 큰 우물이 있는데 이 물이 맑고 푸르기 때문에 아주 좋은 우물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벽정 즉 벽우물이라 부르게 되었다.
▲좌면(佐面洞, 바리미)
원래 대촌리였으나 일제강점기부터 좌면동이라 불리웠다. 동네 뒤에 平章山이라는 산이 있는데 그 산에는 중국 평장사(平章事)라는 큰 벼슬을 지낸 사람의 묘가 있어서 이름이 평장산이 된 듯하다는 설로 보아, 중국사람이 이 곳에 정착하여 살던 마을이라 하여 대촌리라 불린 것으로 짐작된다.
▲대곡(大谷洞, 큰골)
뒷산의 이름이 채미산인데, 골짜기가 여러 개 있는 중에서 제일 큰 골짜기의 마을이라 하여 대곡동이라 칭한다.
▲박마도(박마염)
이곳에 원래 박마염이라는 돌섬이 있었는데 광복 직후 간척사업의 일환으로 박마염에서 양촌면 학운리의 삼도(三島)까지 제방을 신축하여 농지가 개발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어호(漁湖洞, 어모루)
서해 바닷가에 있는 마을로서 큰 포구가 있었는데 어호동, 어모루포구라고 부른다.

3. 약암리(藥岩里)
▲적암(赤岩, 붉은 바위)
승마산 서북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마을 안에 붉은 돌들이 많이 있고, 또 붉고 큰 바위가 있어서 붉은 바위(赤岩)라고 부르게 되었다.
▲약산(藥山)
이 마을의 뒷산 이름을 약산이라 하는데 예전에는 이 산에 좋은 약초가 많이 있었으며, 약수도 있어 산의 이름을 약산이라 불렀다.

4. 상마리(上馬里)
원래는 상적암리(上赤岩里)와 도마산리(陶馬山里)가 있었는데 상적암리의 상자와 도마산리의 마자를 합하여 상마리라 칭한다.
▲신기(新基, 새터)
이 마을은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터라 부른다.

5. 율생리(栗生里)
율촌리(栗村里), 종생리(終生里), 모정리(牟井里)의 3개 里를 합병한 후 율촌의 율자와 종생의 생자를 합칭하여 율생리라 불린다.
▲율촌(栗村, 굳밤이)
이 마을은 옛날부터 밤나무가 많았으며 굵고 좋은 밤이 생산된다 하여 율촌이라 칭하여 왔다.
▲새마을
이 마을은 면사무소 앞에 있는데 8·15광복 후 월남한 사람들이 정착, 새로 부락이 생겼다 하여 새마을이라 칭하게 되었다.
▲종생(鍾生, 종승)
고려시대 이 마을 뒤에 절이 있었는데 아침저녁으로 종소리가 난다하여 종성(鐘聲)마을이라 불렀는데 이후 종생(鍾生)으로 고쳐서 사용했다.
▲모정(牟井, 보리우물)
원래 이 동네에 우물이 있었는데 뒷산의 형국이 ‘말이 보리를 먹고 보리 우물에서 물을 먹는 형’이라 하여 모정(牟井) 혹은 보리우물이라 하였다. 보리우물이 음이 변하여 ‘버리물’이라고도 부른다.

6. 초원지리(草元芝里)
옛날에 좋은 풀이 무성한 동네라 하여 초원지리라 불렸다.
▲용산동(龍山洞, 용산머루)
마을 뒷산 형국이 용과 같다하여 용산동이라 하였으며 마을이 용의 머리 위치에 있다 하여 용산머루라고도 부른다.
▲간동(間洞, 샛말)
용산동과 월감 사이에 끼어 있다 하여 間洞 혹은 샛말이라 한다.
▲월감(月甘, 달감)
마을의 형국이 반달과 같이 구부러진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달감(月甘)이라 부르고 있다.

7. 거물대리(巨勿垈里)
여러 유래가 있는데 첫째는 묵죽(墨竹)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것은 ‘검은 대’라는 뜻이니 이로 인하여 ‘거뭇대’라 칭한다는 설과, 둘째 거부(巨富)들이 많이 살던 터라 하여 巨勿垈가 됐다는 설 등이 있는데 묵죽골이 있는 것으로 보아 검은 대가 옳은 듯하다.
▲곡촌(谷村, 갠돌이)
이 부락은 묵죽과 내촌 사이에 골짜기 마을이라 하여 곡촌이라 하는데 아래 부락은 갠돌이(醒石, 성석)라고도 부른다.
▲내촌(內村, 안말)
거물대리 자연부락 중에서 제일 크고 아늑하며 먼저 생긴 마을이라 하여 내촌이라 한다.

8. 오니산리(梧尼山里)
오리산 밑이라 오리미, 오리산, 오림, 오림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양릉면의 오라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오니산리라 했다.
▲오림동(梧林洞, 오리미)
마을 뒷산의 봉우리가 다섯이며 오동나무가 많이 있다하여 오림동이라 부른다.

9. 송마리(松麻里)
원래 고리곶리의 송아리(松芽里)와 마당포(麻唐浦)를 병합하여 송아리의 송자와 마당포의 마자를 합칭하여 송마리라 부르게 됐다.
▲팔거리(팔가리, 八街里)
통진군 시절에 통진남면쪽에서 읍으로 가는 길목에 길이 여덟갈래로 나 있어서 여덟거리로 부르고 한자로 八街里로 칭한다.
▲성포(城浦)
예전에 이곳 성포마을 앞에 포구가 있었고 마을 뒤에는 토성(土城)이 있어서 성과 포구를 합하여 성포라 불렀다.
▲산척(山尺)
마을 앞뒤 산들이 아주 작은 봉우리로 형성되어 1자씩밖에 안 되는 여러 산봉우리에 싸여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소래(蘇來)
원래 앞뒷산에 소나무가 무성하여 송아리라 하였는데 송아리가 소래리로 음이 바뀌어 전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10. 석정리(石井里)
석정은 글자 그대로 ‘돌우물’이라는 뜻으로 석정리의 주산(主山)인 오봉산(五峰山) 석회암층에 연결된 암반 속에서 솟아나오는 약수로서 물맛이 좋아 통진 고을 원님이 길어다 먹었다하여 ‘골우물’이라고도 불러왔다.
▲석정(石井, 돌우물, 골우물)
석정리 앞에 있는 큰 우물. 돌로 되어 있으며 조선 제16대 인조5년(1627)에 그 아버지의 능(장릉)을 북성산으로 옮길 때 장릉에 물이 많으므로 그 물의 맥이 되는 이 샘을 크게 확장했다 한다.
▲산골(山谷)
깊은 산골이라 하여 山谷이라 부른다.

11. 쇄암리(碎岩里)
이 마을 서쪽 해안에는 암벽이 많은데 잘 부스러지는 돌로 돼있어서 쇄암리라 부른다.
▲구룡촌(龜龍村)
마을의 산세가 용이 바다로 내려가는 형이고, 앞바다에는 부래도(浮來島)라는 조그마한 섬이 있는데 거북이(龜)가 물에 떠있는 형이어서 용과 거북이가 같이 만나는 모양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신촌(新村)
새로 마을이 생겼다 하여 새마을, 즉 신촌이라 부르게 되었다.

12. 신안리(新雁里)
조선시대에는 상신리(上新里)와 안행동(雁行洞) 두 개의 마을이었으나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 때 상신리의 신자와 안행리의 안자를 합하여 신안리라 부른다.
▲덕포(德浦)
예전 이곳에 포구가 있어 인천과 서울을 왕래하는 운반선과 어선들이 많이 드나들었는데 지덕(地德)이 좋다 하여 덕포라 불린다.
▲안행(雁行)
마을의 형세가 ‘기러기가 줄지어 날아가는 형’이라 하여 기러기 안(雁)자와 갈 행(行)자를 합하여 안행동이라 한다.

13. 대명리(大明里)
중국 하(夏)의 제2대 왕인 명승(明昇)이 외침을 받아 항복한 뒤 모후(母后) 팽씨(彭氏)와 같이 망명하여 통진땅에 상륙하여 살게 된 곳이 대명리라는 것인데, 대국(大國)의 명왕(明王)이 망명하여 살던 곳이라 하여 대명촌이라 부르게 된 것이 지금의 대명리가 된 유래라 전해진다.
▲학의(鶴儀)
마을 뒤의 산모양이 학이 노는 형태라 하여 학의동이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사래(沙來洞, 사래울)
뒷산에서 모래가 내려와서 쌓이므로 그 마을 이름을 사래울, 사래동이라 불렀다.
▲한정(寒井, 찬우물)
마을 가운데 큰 우물이 있는데 그 물이 차고 맛이 좋아서 찬우물이라 했고 이를 한자로 寒井으로 썼다.
▲고잔(高棧)
제방이 건설되지 않았던 시절,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드나들어서 갯골에다 높은 잔교(棧橋)를 설치하여 이용한 마을이라 하여 고잔(高棧)이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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