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나동그라져 있었습니다. 양동이도 자리에서 일어나 헐떡거렸고 돌미륵 대신 토정 선생이 앉아 계셨습니다. 일어나서 토정 선생에게 놀라 말했습니다.

“인간으로 돌아오셨군요. 선생님!”

“응. 그런 모양이다.”

토정 선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씀하셨습니다. 묘는 보이지 않고 염포교 일당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좀 전과 다른 풍경으로 보아 우리가 시간을 거슬러 온 것은 분명합니다.

“이제 중봉 조헌의 시대에서 조선의 제갈량 눌재 양성지 선생의 시대로 돌아왔다. 지금 우리는 백이십팔 년을 거슬러 세조 임금 시대에 있는 것이다.”

토정 선생은 이 자리에 앞으로 양성지 부부의 묘가 세워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꿈을 통해 몇 백 년의 미래를 살면서 별 것을 다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꿈이지 현실이 아닙니다. 그런데 백 년 넘은 곳으로 거슬러 왔다는 것이 영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저희와 함께하실 건가요?”

아무리 낯선 곳이지만 토정 선생만 계시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아니다. 나는 이미 죽은 몸이니 때 되면 저세상으로 가야 한다. 계속 머물면 해가 닥친다.”

토정 선생의 말에 의하면 풍문을 잡으려는 인간 염포교는 올 수 없으나 자신을 잡으려는 염라대왕은 올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재수 없으면 그자에게 잡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으흠, 그러면 할 수 없군요. 이곳까지 왔는데 또 그놈에게 시달릴 수는 없지요.”

천하의 기인 토정 선생의 도움을 받아 편하게 살아보려고 했지만 다 틀렸다, 아무래도 내 운명은 내가 개척해야 하나 보다고 생각했습니다. 양동이는 오대조 할아버지인 양성지 선생을 만난다는 것에 설레는 모양이었습니다.

“양성지 선생은 지금 나이가 마흔아홉이니 자네들과 동갑이야. 친구처럼 가까워질 수 있어.”

나이는 그렇다 해도 되겠습니까. 상대는 고위 관리고 저는 천민 재담꾼이고 양동이는 양성지의 후손이라도 해도 오대조 할아버지입니다. 동격이 될 수 없지요. 토정 선생은 제 마음을 알아차렸나 봅니다. 그래도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는 것이 현명한 처사라고 충고하셨습니다.

“저기 있다!”

육모 방망이를 든 포졸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놀라서 도망치려 하자 토정 선생이 만류했습니다. 우리가 저항하거나 도망치지 않자 그냥 오라만 지어서 끌고 갔습니다. 우리가 끌려간 곳은 통진 관아였습니다. 형방으로 보이는 자가 추궁합니다.

“네놈들이 황당선에서 내린 자들이 분명하지?”

“황당선?”

정말 황당한 질문입니다. 황당선은 서해안을 통해 오가는 외국 배를 일컫는데 대부분 해적선이나 밀수선이었습니다. 이들은 아마도 낯선 우리가 그 배에서 내린 것으로 착각한 모양입니다. 내가 뭐라고 하자 토정 선생이 말을 끊고 답합니다.

“우리는 눌재 양성지 선생을 만나 뵈러 먼 곳에서 왔소. 그분을 만나게 해주시오.”

현감으로 보이는 사람이 입을 엽니다.

“눌재 대감의 별장이 이곳에 있는 것은 분명하나 휴가 때나 오시지. 언제 오실지도 모르네.”

“사흘 뒤에 통진 관아에 들르실 것이니 그때 말씀해 주십시오.”

당당한 말에 현감이 점잔을 빼며 묻는다.

“그러면 너희는 황당선에서 내린 표류객이 아니란 말이냐?”

나는 128년 후의 세상에서 거슬러 왔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영어로 타임슬립이지요.

최영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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