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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茶山과 天主敎신앙
이택룡 
수필가
경영학박사
전)명지전문대학교
교수

茶山 丁若鏞 선생은 1762년(영조38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 마을에서 5남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주목사(晋州牧使)를 지낸 정재원(丁載遠1730-1792)으로, 사도세자(任午禍變)에 연루돼 관직에서 물러났다. 어머니는 해남 윤씨(1728-1770)이며 고산 윤선도(尹善道)의 후손으로 학자이자 화가로 유명한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손녀이다. 학문과 벼슬로 이름이 높았던 호남의 대표적인 남인계 집안이었다.

선생의 집안은 기호 남인에 속하며, 선조 가운데 연달아 8대에 걸쳐 홍문관(弘文館)벼슬을 지내 ‘8대玉堂집안’이라고도 한다. 형제들로는 장형이 이복으로 의령 남씨 소생의 정약현(丁若鉉)이고, 그의 첫 부인이 처음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이벽(李蘗)의 누이였다. 딸이 황사영(黃嗣永)과 혼인해 다산의 조카사위가 된다. 어머니 해남윤씨 소생으로는 둘째 형 정약전(丁若銓)과 셋째 형 정약종(丁若鍾)이 있다. 그의 누이가 이승훈(李承薰)과 혼인하여 다산의 매부가 된다. 서모 김씨 소생으로 정약횡鐄이 있다. 그러므로다산은 우생학적으로 볼 때 훌륭한 양가 혈통을 받아 타고난 천재인 것 같다. 이승훈은 북경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천주교 세례를 받았고, 정약종은 주교요지, 성교전서 등 교리책을 지은 사람으로 신유년에 순교했다. 그러고 보면 다산은 천주교인들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그리고 유형원(柳馨遠), 이 익(李瀷)으로 이어지는 실학을 계승, 실용지학(實用之學),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하며 실학을 집대성하였다.

어린 나이(7세)에 漢詩를 쓸 만큼 영특하고, 9세 때 어머니가 별세했고 열살 때 경서와 역사서를 배우기 시작했다. 15세에 풍산 홍 씨와 결혼했다. 홍 씨는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낸 홍화보(洪和輔)의 따님으로 당대 남인계의 명망 높은 집안이다. 남인계 소장학자인 이가환(李家煥,이익의 종손), 이 벽(李蘗1754-1785), 이승훈과 교유하면서 실학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이 익(李瀷)의 유고를 읽고 그 영향을 받았고, 다산이 22세 때 과거시험에 합격,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정조대왕을 만나 그의 총애를 받게 되는 풍운지회(風雲之會)가 됐다. 23세 때에는 이벽으로부터 천주교에 관한 설명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28세인1789년에 대과(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로 들어섰고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3시를 거쳐 34세때 당산관인 정3품 부승지에 오르게 된다. 이때 천주교는 교세확장을 계속하여 천주교에 입교한 사람이 대부분 남인이었기에 서인쪽과 갈등이 심해졌다. 그분은 일찌기 규장각(奎章閣)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되니, 왕의 총애 속에서 재주와 능력을 발휘했다. 한편 1791년에 전라도 진산에서 천주교 신자인 윤지충(다산의 외사촌), 권상연이 그의 모친상을 치르다 상청을 거두고, 신주를 불살라버린 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유교 중심사회의 조선에서는 있을 수 없는 큰 사건이었다. 그래서 사헌부는 이들을 패륜으로 단정하고 처형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다산은 노론 벽파들에게 시달리게 되었을 뿐 아니라 천주교를 배교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조선시대의 그와 같은 조상을 모시는 어긋난 태도가 다산으로서도 감당하기 쉽지 않은 처지가 된 것이 아니었나 싶다. 33세에는 경기 북부 암행어사로 나가 백성들의 참혹상을 목격했고, 권세를 휘둘러 민폐를 끼친 관리들을 처벌하도록 임금에게 보고했다. 1795년 4월에는 중국인 주문모(周文謨)신부가 입국했고, 정조는 이가환을 충주목사로, 다산을 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좌천해 임명하고, 이숭훈은 예산 현으로 유배됐다. 이는 왕이 다산을 천주교 혐의를 씻어줘 정치적 공세를 벗어나게 한 것이다. 또한 1797년 6월 정조는 다산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임용했으나 이를 사양함으로써 천주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다음 달 왕은 다산을 황해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임명했다. 이는 다산을 외직에 근무케 하여 파당의 불길을 진정시켰고, 그곳에서 2년간 피폐한 민생을 바로잡는 행정을 펼 수 있었다. 문학을 좋아한 정조왕은 1799년 38세 때 다산을 다시 형조참의(刑曹參議)로 제수하여 그를 매우 신임했다.

하지만 다산은 1800년 봄, 39세에 처자식을 거느리고 마현에 낙향해 노론파의 공격을 피하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다가 정조대왕이 갑자기 세상을 뜨니, 다산은 보호막이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어린 순조가 즉위하니, 정순왕후 김 씨가 수렴청정하면서 조정의 주도권은 노론 벽파가 장악하게 된다. 1801년 순조1년 대왕대비의 언교(諺敎)로 박해령(迫害令)을 선포, 전국의 천주교도들을 체포했다. 이것이 신유사옥(辛酉邪獄)사건이다.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동원한 수색으로 많은 천주교인들이 체포되었고, 300여명의 순교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중국인 주문모(周文謨)신부는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로 목숨을 잃었고, 이승훈, 이가환, 정약종, 최창현, 강완숙(여신도회장) 등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천주교를 믿던 왕족인 정조의 서제인 은언군(恩彦君)이 부인 송씨와 며누리 신씨 또한 죽임을 당했다. 다산이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형 정약종과 함께 옥에 갇혀 형의 죄상유무를 문초당할 때 다산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可以欺君, 弟不可以證” 즉 “형이 죄를 지었는데 아니라고 하면 임금을 속이는 것이요, 바른 말을 하면 형이 죄를 당할 것이니 어찌 하리요”라며 슬퍼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형 정약종은 끝내 죽음을 당했고, 다산은 배교의 증거가 제시돼 죽음을 면하고, 경상도 장기로 유배됐다가 그해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서울로 다시 압송된 그분은 결국 전라도 강진에 유배돼 40세부터 57세까지 18년간의 유배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그분은 강진에 귀양이 결정됨으로서 금부를 떠나던 날, 그 심정을 이렇게 말 했다고 한다. “罪名白地無中出, 心事靑天在上知”라, ‘죄명은 백지 무로 나와도, 마음은 푸른 하늘 상재가 아느니라’고 했다. 그분은 유배기간동안 좌절하지 않고 학문과 저술활동에 열중했다. 그러나 언제 목숨이 달아날지 모르는 처지였기에 그 불안한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錄色惟身小小跬, 一生端正坐梅査,

非渠取有居高願, 恐被鷄腹活見理”

‘말할 것도 없이 그의 몸은 청개구리에 비유해 언제 잡아먹힐까 항상 겁낸다는 뜻’이다. 그러자 그보다 앞서 그 고을에 정배 갔던 재상이 풀려 간다고 했다.

다산이 강진에 도착하니, 때는 추운 겨울이었다. 대역죄인이라 모든 사람들이 접촉을 피했다. 누추한 방에 사의재(四宜齋)라는 이름을 붙여 ‘네 가지 마땅함‘ 즉 “생각은 맑아야, 용모는 장엄해야, 말은 과묵해야, 행동은 중후해야한다”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1808년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기게 돼, 그 연구공간에서 방대한 저술에 힘썼고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잠시 다산선생이 강진 유배지에서 18년간의 고통스럽던 삶을 떠올린다. 정호승 시인은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길을 “뿌리의 길”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나라의 뿌리는 백성이고, 정치의 뿌리 또한 백성임”으로 공직자는 나라의 백성이 주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야 되겠는가 말이다. 그러고 보면 ’신곡(神曲)‘의 대작을 남긴 ‘단테’나, 중국인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의 대작을 낸 경우, 그리고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비롯한 ‘경세유표(經世遺表)’등 5백여 권의 대작을 저술한 것이, 다 같이 쓰라린 유배생활이 그 계기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다산의 천주교 신앙에 대한 논란을 김학열 신부는 1806년 강준호의 상소와 무자년 1828년 예부좌랑 윤극배의 상소에서 다산을 천주교 신자로 규정한다며, 가문의 보존을 위해 명쾌하게 기술할 수 없었다고 전한다. 한국천주교회사를 저술한 ‘달레’ 신부는 다산이 귀양살이에서 풀려 돌아온 뒤, 그는 교회 본분을 지키고, 예수그리스도의 신앙을 진심으로 뉘우쳐 세상과 떨어져 살며, 거의 언제나 방에서 자주 대재(大齋)를 지키는 苦身克己의 생활로서 쇠사슬로 허리띠를 만들어 메고 한 번도 그것을 끌려놓지 않았다고 한다. 천주교 신앙에 대한 증거를 천진암과도 연결돼 있다. 1827년 65세 나이에 천진암에 오르는 바윗돌 사이로 다닌 오솔길은, 내가 어릴 적에 놀던 길인데 다시와 보니 “나그네의 마음이 서글퍼지네”라고 노래했다. 그리고 고향 마재 집터에서 발견된 묵주, 십자가, 성패, 성모상 등과 수원화성에 축조된 서쪽 벽면의 십자형 문양이 다산의 신앙이 바탕이 됐다는 주장이다, 이는 다산과 천주교 상관관계를 뜻하는 다양한 증거들이다. 한국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 최석우 몬시뇰은 다산이 천주교신자임은 명백한 사실이다. ‘요한’이란 세례명을 받았고, 그는 배교를 뉘우치고 환갑 때부터 마음을 새롭게 하고 바오로 성인과 같이 회심을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흠흠신서’(欽欽新書)는 고향집에 돌아와 저술을 마쳤고 또한 2,700여의 서정시 및 사회시를 지어 강진 일대의 풍속과 세태를 읊으며, 압제와 핍박에 시달리던 농어민의 참상을 눈물어린 시어로 대변해 주었다. 선생은 회갑 때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쓰면서 자신의 호를 사암(俟菴)이라 했다. 이는 “백세이후 성인을 기다려도 미혹됨이 없다” 百世以侯聖人而不惑에서 딴 이름으로 학문적 자부심 일 수도 있고, 훗날에 대한 기다림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1836년 回婚日인 2월22일(양력 4월7일) 회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가족들이 보는 가운데 75세의 삶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참고자료 : 다산연구소(https//www.facebook.com/edasan.org)

 

김포신문  gimpo12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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