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현대사 속에 아픈 이야기들

박태운 발행인

『우리는 이에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여 인류 평등의 대의를 분명히 하며, 이것을 자손만대에 고하여 민족자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유케 하노라』 독립선언서의 일부이다. 독립국·자주민 지위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간명하게 보여준다. 이 시대를 이어가는 대한민국 사람들은 민족자존과 평화를 자손만대에 이르도록 국가와 국민은 분열과 갈등을 봉합해가며 하나가 되어야 국제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이것은 모두가 명심할 중차대한 과제다. “하나가 되자” “분열은 죽음이다”신 한반도 시대의 선결 조건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환국·배달국의 上代史(상대사), 조선·대부여·북부여의 古代史(고대사)로 7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부분은 학자들 간의 이견이 많다. 우리가 고대사 논쟁을 하고 있을 때 중국은 동북공정·서북공정을 하면서 우리의 上代史, 古代史가 발굴되면 중국의 역사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겨우 고구려·백제·신라와 후삼국까지의 中代史를 증명 가능한 우리의 역사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고대사를 거부하는 학설이 맞는지, 아닌지는 차치하고 지금은 고려·조선에서 대한제국 국호를 처음 사용한 1897년까지의 근대사와 이후의 현대사에서 명멸하는 우리 민족의 개략 발자취를 살펴보기로 하자.

동학혁명, 조선중기에 일어났어야
대한제국 직전 1860년은 동학혁명이 일어난 해로써 모든 사람은 하느님을 모신 주인으로 반상제도, 남존여비, 적서차별을 타파하는 운동이 전개되어 사람을 하느님처럼 여기고 공경한다는 당시에는 상상치도 못할 사회 대개혁을 주장하는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우리 민족 역사상 진정한 민본과 민주와 함께 인권을 내세운 획기적 운동으로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후세가 크게 기릴만한 혁신적 내용을 담고 있다.
동학을 난으로 보고 자력으로 막을 수 없자 일본군이 투입됐고 일본인 체격에 맞는 소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의해 거의 살육에 가까운 싸움으로 동학군은 무참한 죽음을 면치 못했다. 이를 기화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했다. 최제우 선생의 위대한 사상으로 왕권을 무너뜨리고 우리 민족이 다시 피어날 수 있는 정상국가의 염원은 무너졌다.
동학군의 실패는 전략의 부재에 있다. 시대를 관통하는 이해를 바탕으로 뜻을 펼칠 수 있는 힘을 길러내고 전국 일시의 거사로 짧은 시간에 왕권을 무너트리고 국사를 장악했어야 했다. 그런 다음 외교를 통해 강력한 개방정책을 펼쳤다면 조선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온전성을 유지하며 튼튼한 국가로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일본이 미국 함대에 패하여 문호 개방한 것이 1858년으로 동학이 일어난 1860년과 거의 동시대에 해당한다.

병인양요, 개방적기 놓쳐
당시의 조선은 60년의 안동 김 씨 세도정치로 과거제가 문란하여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환곡의 문란으로 국가 재정이 토탄에 빠졌다. 희망 잃은 백성들이 종교와 신앙에 매료된 배경이기도 했다. 1863년 고종 즉위와 대원군의 등장은 병인양요의 시발점이 된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천주교도 8,000명을 처형함으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수성하는 병사들을 우월한 무기로 항복도 모르고 덤벼드는 조선 군인들을 일방적으로 죽였다. 프랑스 전사에서도 강화도 점령 전사는 특이성을 기록한다. 조선군 병사는 항복하면 살려줄 텐데 죽음을 무릅쓰고 상대도 안 되는 무기를 갖고 끝까지 달려들어 프랑스 군사들은 죽이면서도 안타까워했다고 기록한다.
1년여를 강화도를 지배했을 때도 고종은 불통의 아버지인 대원군을 설득하고 사태의 판단을 보다 객관적으로 했다면 이 시기 또한 문호 개방과 통상개방의 시대를 열었을 것이다. 당시의 권력가 대원군의 세계를 보는 눈은 전략적이 아닌 , 아전인수의 옹고집 시각으로 7척의 거대 함대를 지구를 돌아 몰고 온 프랑스라는 국가에 대하여 그 힘과 위용을 미루어 평가하는 기본적 인식과 판단이 절대 부족했다.
정보의 부재이기도 하지만 모든 불통과 고난의 해결 고리는 접촉과 대화라는 기본에 조선의 왕과 정치를 하는 대신들은 낯설고 부족했음을 드러낸 양태이기도 했다. 국가 기본이 바뀔 동학의 태동과 성장도 역사의 시간에서 타이밍이 빗나갔고 프랑스 함대의 강화도 점령 1년은 조선이 일찍이 일본처럼 진보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시기의 일실이었다.
1869년의 을미사변은 명성왕후 시해라는 몹쓸 사건과 개화정책을 주장한 명성황후라는 유력인사의 상실에서도 그 의미가 깊다. 당시의 위정척사(衛正斥邪)는 바른 것은 지키고 그른 것은 배척한다는 유교문화 수호로 서양문화를 배척한 당시의 중심세력인 유림의 근시안적 안목도 한몫을 거들었다. 임오군란시 발생한 문제로 일본과의 제물포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본군의 한양 주둔이 용인되고 청·일 전쟁으로 조선에 대한 지배적 침탈 권리를 확보했고 러·일 전쟁마저 승리하면서 광산채굴권, 철도부설권, 산림채벌권 등등 한반도에 대한 실질적 침탈행위가 본격화됐다.
1897년 10월 고종은 청·일 전쟁으로 중국의 그늘에서 벗어나자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국임을 천명하면서 의회정치·개혁정치를 주장하는 만민공동회, 황국협회들이 생성됐지만 격렬하게  변화하는 서세동점의 시대에서 커다란 결실을 얻지 못하고 1904년 러·일 전쟁 중 한·일 의정서가 한·일 협정서로 바뀌고 1905년 2월 독도를 다케시마로 명명하기도 했다.

을사보호조약으로 주권상실
7월에는 태프트·가스라 조약으로 미국의 필리핀 침략과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을 상호 승인하고 러시아가 대한제국에 불간섭하기로 한 포츠머드 강화조약으로, 그 해 11월 일본은 드디어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고 대한제국의 주권을 일본으로 가져가면서 외교권을 박탈했다.
우리의 식민지배는 사실상 이때부터로 기산 할 수도 있어 35년의 억압이 아닌 40년간의 일제 억압인 것이다. 1909년 조선 숙종 때 토문강 정계비를 세우고 간도를 조선 땅으로 표시한 것을 일본이 청나라와 간도협약으로 단동·봉천 간의 철도부설권을 청나라에서 얻는 대신 간도 땅을 청나라에 넘겼다. 이 부분도 향후 국제적 불씨로 남아있어 간도 땅에 대한 영유권 분쟁도 미래의 어느 날 우리의 당면 과제로 떠오를 날이 있을 것이다. 후손들이 꼭 기억할 대목이다.
같은 해 10월 26일은 “나는 의병 참모 중장이다. 독립전쟁을 했으니 전쟁포로로 대우하라”는 안중근 의사의 거사가 있었다. 안중근 의사가 적시한 일본과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 15가지는 그 당시 일본이 대한제국에 저지른 크고 작은 죄상들이 또렷이 기록돼 있다.

독도·대마도·간도는 후세의 화약고
독도·간도와 더불어 우리가 주목할 또 하나의 영토는 대마도다. 1419년 6월 세종대왕은 대마도를 정벌하여 세종실록 제1권에 “대마도는 본래부터 우리 땅이다”라고 기록한 것인데 1871년 8월 대마도주 종의달이 일본에 바쳐 1877년 나가사키현에 편입된 것으로 1948년 8월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에게 대마도 반환을 요청하였는데 일본 여자에 빠진 맥아더가 일본 편을 들어준 것이 못내 아쉽다. 1910년 8월 22일 체결한 한·일 합방조약은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한 언제든 잊지 말아야 할 치욕과 수치의 날이다.
이후 본격적인 일본 총독부 시대가 개막되었고 영구 지배를 위한 일본어 교육, 민족정신 말살정책, 특히 노예로 부려먹을 만큼만의 교육을 제공하여 해방 이후 미군정청이 국가와 지방에서 일할 만한 공무원들을 찾는데 적임자가 도저히 부족하여 일제 치하의 앞잡이들까지 마구 기용됨으로 실질적 일제 치하 인적청산을 못한 구실로 작용했고, 그 여파가 70년 후 까지도 미치고 있는 안타까움으로 민족반역자에 대한 온당한 처단이 되지 않으므로 투명하고 깨끗한 과거청산을 못한 결과 그 자손들이 지금 사회에 더 많이 득세하는 아이러니컬한 모습을 보게 됐다.
민족의 구심점인 창경궁을 창경원이라는 동물원으로 만드는 등, 민족혼과 정신을 혼미시키는 활동을 조직적이고 지속적으로 펼친 일본을 향해 최초로 우리의 목소리로 우리의 몸으로 우리의 정신과 혼으로 일어나 부딪친 1919년의 독립운동은 지독한 민족말살 정책 속에서 피어난 기적에 가까운 꽃이며 횃불이며 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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