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명 스님
대한불교조계종
연운사 주지

참을 만하면 참아야 하고 견딜 만하면 견뎌야 한다. 지나친 욕구와 욕망은 사람을 조급하게 만든다. 그러나 조급함의 끝은 후회다. ‘참는다’는 말은 사람에 대한 인내를 말하고, ‘견딘다’는 것은 환경에 대한 인내를 말한다. 인내한다는 것은 서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내는 상황에 판단을 앞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 전국시대에 패권을 차지했던 세 인물이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들이다. 이 세 사람을 평가하는 이야기가 있다. 울지 않는 앵무새를 앞에 두고 그들의 반응은 달랐다. 오다 노부나가는 말하기를 “앵무새가 울지 않거든 죽여 버려라”라고 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앵무새가 울지 않거든 어떻게든 울게 만들어라”라고 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려라”라고 했다. 성급하고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 오다, 목적을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권모술수의 인물 도요토미, 그리고 인내를 가지고 때를 기다리는 무섭도록 차가운 도쿠가와, 이 세 사람 가운데 도쿠가와가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고 일본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막부가 됐다. 결국 참고 견디는 사람이 천하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내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나쁜 음식은 아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고난이라는 문 앞에 서게 된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 문을 두드리고, 누군가는 그 앞에서 돌아서며, 누군가는 그 문을 열고 지나간다. 물론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이 진 짐이 제일 무겁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자신이 진 짐은 자신이 질 수 있으니까 진 것이지, 질 수 없는 짐을 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얼마나 참느냐가 승패를 가름한다. 내일은 어떨지 몰라도 오늘 감당할 수 있는 일이라면 참고 견뎌야 한다.

 

보이지 않는 가치의 귀중함을 얘기하는 실화를 소개해 본다. 마이클 플랜트(Michael Plant)는 세계적인 요트 조종사였다. 단신으로 태평양과 대서양을 수차례 항해하였으며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기술과 명성을 얻었다. 그는 1992년 다시 항해를 준비했다. 최고의 항해 장치를 부착한 최신식 요트를 구입한 후에 그 배 이름을 '코요테'(The Coyote)라고 불렀다. 요트 코요테는 그의 꿈을 이루기에 가장 적합해 보였다. 그 최첨단 요트에는 자동무선레이더와 위치 인식시스템(GPS)이 설치되어 좌표 상에 그의 위치가 정확히 표시될 수 있었다.

그런데 플랜트가 이 요트를 타고 항해를 떠난 지 11일 만에 무전연락이 두절되었다. 수색팀이 구성되어 요트를 찾았지만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포르투갈 근처에서 한 어부가 전복된 요트를 발견하였다. 전문가들은 코요테호가 전복된 상태로 발견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요트는 그 구조상 거의 전복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뒤집힌 이유를 조사해보니 요트 밑에서 무게 중심을 잡아주는 밸러스트(ballast)가 선체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었다. 밸러스트는 3.6톤이나 되는 보트를 안전하게 해주는 중요한 부품인데 그런데 이것이 떨어져 나가 배가 전복된 것이다. 조사단은 요트가 전복한 이유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플랜트가 자기 기술과 힘만 믿고 요트를 만들 때부터 보이는 부분에는 신경을 썼지만, 보이지 않는 수면 아래의 밸러스트에 대해서 신경을 덜 쓴 것 같습니다.”

귀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다.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욱 더 그렇다. 눈앞에 보이는 이익에 집착하다 보면 ‘신의’나 ‘정직’과 같은 중요한 가치들은 등한시하게 된다. ‘속도’에 집착하다 보면 ‘안전’은 뒤편으로 물러나게 된다. 육신의 쾌락에 마음을 쏟다보면 정신의 사막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지 못한다. 오늘 하루는 내 인생에 있어 무엇이 더 소중한 것인가를 찾아보는 날이 되었으면 한다.

 

부처님의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는 ‘도덕적으로 사는 것’이 ‘남을 위해 사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저 신비로운 종교 경험이나 금욕생활, 그리고 한계를 극복하는 자기증명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부처님은 해탈을 경험한 뒤에는 히말라야 산맥에서 홀로 유유자적하며 니르바나에 안주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땀내가 나고 북적이는 인간 군상들이 모여 사는 시장으로 돌아와 자신뿐만 아니라 모두를 향한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특히 다른 사람의 불행을 경감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해냈다.

부처님은 열반에 든 뒤 초월적 평화에 탐닉하려는 영적인 유혹에 빠질 뻔했지만, 남은 40년의 생을 길거리에서 다른 이들에게 자신이 터득한 바를 가르쳤다. 대승 불교에서 이상적인 인간상은 ‘보디사트바’ 즉 보살(菩薩)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의 직전에 열반의 희열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세상의 고통으로 돌아가기로, 사람들과 함께 희로애락을 견디기로 결정한다.

종교는 흔히 신념 체계라고 잘못 알려져 있다. 종교에서는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에서 소중한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며, 그 과정에서 습득된 행동이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것이다. ‘믿는다’라는 영어 동사 believe의 의미는 ‘삶에 있어서 자신에게 소중한 것(lieve/Liebe)을 찾아 우선순위를 매기고, 그것을 충실하게 지키는 삶’이다. 성급한 종교 비교는 종교 간 우열을 매기고 자기 종교의 기준에서 다른 종교를 판단하는 오류를 범한다. 이제 그 ‘다름’을 ‘참아주는 행위(톨레랑스)’에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존경으로 변화해야 한다. 한 종교만 옳다고 주장하는 처사는 지난 2000년 이상 면면히 흘러와 인류 역사를 바꾼 종교에 대한 모독이다. 각 종교는 나름대로 자기만의 독특한 상징체계와 행동 양식이 있다. 이를 존중하고 배려하고 이해한다면, 각 종교 간의 다름이 다양한 색감이며 이러한 다름이 바로 조화요 아름다움이 되는 것이다. 종교를 숲속의 꽃과 나무가 다양하게 이루어져 있음처럼 받아들인다면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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