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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김포관아의 복원과 부분복원의 필요성(3)

         <한필교의 숙천제아도에 있는 김포관아>

 

정 현 채 
문화기획자

1867년 김포군수로 재직했던 한필교의 숙천제아도에 있는 김포관아의 명칭을 살펴본다. 숙천제아도는 한필교가 발령 받는 곳마다 그림으로 남겨서 한권으로 엮은 화첩이다. 김포관아의 그림에 표기되어 있는 곳 중에서 먼저 산(山)으로는 천등산(天登山), 냉정산(冷井山), 중봉산(重峯山), 한강건너 삼각산(三角山)과 냉정산에 봉수대가 있다. 릉(陵)으로는 386년 前 김포문화를 변화시켰던 장릉이다. 장릉은 1626년(인조 4년)에 부친 원종(元宗)과 인헌왕후(仁獻王侯)의 능을 양주에서 김포관아 터로 옮기면서 현을 지금의 북변동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이때 김포현에서 김포군으로 승격한다.

 

대로(大路)는 고촌의 천등산에서 김포관아로 오는 동거양천대로(東距陽川大路)길과 김포관아에서 통진(지금의 월곶면 군하리)으로 가는 서북거통진대로(西北距通進大路)다. 지금의 나진교를 지나는 48국도와는 다르다. 북변동 앞으로 멀리 들판(野田)이 보인다. 들판에는 집이 몇 채 있다. 이때는 한강에 둑이 없었던 시절이다.

 

동헌(東軒)은 김포군수가 정무를 집행하던 관아건물이다. 지금의 김포시장이 근무하는 김포시청과 같은 기능을 한 곳이다. 동헌으로 들어가는 문은 담장이 없는 외삼문과 담장이 있는 내삼문이 있다. 동헌에 걸려 있는 현판이 오청헌(五聽軒)이다. 오청(五聽)은 소송을 가려내는 다섯 가지 방법을 뜻한다. 사청(辭聽)은 말이 정연하지 못하고 번거롭다. 색청(色聽)은 낯빛이 붉어진다. 기청(氣聽)은 숨이 차는 기색이다. 이청(耳聽)은 잘못 알아들은 척 한다. 목청(目聽)은 눈에 정기가 없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방법으로 양심을 속이는지 속이지 않는지 먼저 기색부터 살폈다.

 

지금은 공무를 집행하는 공무원이나 시민들도 오청의 기능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기준으로 삼는 교육 자료로 활용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직장에서 보고를 하거나 상대방에게 말을 전할 때 거짓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상대방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는 교활함이 아니다. 사적인 욕심을 갖지 않고 공적인 마음으로 양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다섯 가지는 없을 것이다.

 

전학후묘(前學後廟)형태의 김포향교로 들어가고 나오는 외삼문은 동입서출(東入西出)이다. 유생들이 거주하는 서재가 있고 강학장소인 명륜당이 보인다. 명륜당을 지나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은 신문(神門)이라고도 한다. 대성전은 공자와 제자들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이다. 대성전을 기준으로 앞에는 공부를 하는 곳이요 뒤로는 제사 기능을 하는 형태다.

 

사직단(社稷壇)은 토지의 신(神)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며, 향교 위쪽에 있다. 군수의 가족들이 거처하는 집인 아사(衙舍)가 있고 심부름하는 아이와 노복(奴僕)이 있는 급창간(及唱間)이 있다. 영조와 정조대왕이 방문하여 글을 걸어 놓은 동헌의 누각인 용금루(湧金樓)가 보인다. 동헌 뒤쪽으로 초가집으로 만들어진 화장실 즉 측(厠)이 있다. 측간이라고 하였다. 동헌 앞쪽으로는 말을 기르는 마구간(馬廐間)인 구(廐)가 있다.

 

홍살문을 지나서 금릉관(金陵館)으로 들어가는 왼쪽 건물에는 추방(秋房)(일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방)과 노령청(奴令廳)(지방 관아의 관노비들을 관리하던 관서)이 있다. 금릉관(金陵館)은 관리가 처음 부임하여 왕에게 예를 취하는 곳이며 관리가 머무는 곳이다. 객사라고 한다. 홍살문을 지나서 금릉관(金陵館)으로 들어가는 오른쪽 건물에는 아전들의 집무실과 군기고 및 사창이 있다. 그밖에 지방 행정의 실무를 담당하는 향리 및 아전들의 사무실인 작청(作廳), 지방의 행정을 의논하는 군사(郡司), 군기를 보관하는 군기고(軍器庫), 병방(兵房) 소속의 장교들이 근무하는 장청(將廳), 수령을 보좌하는 행정 실무의 일부를 집행하는 기구인 향청(鄕廳), 양곡을 관리하는 사창(司倉)이 있다.

 

여단(厲壇)은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 없는 귀신을 위한 제단이다. 여단을 보면서 유도 앞쪽의 구슬픈이에 삼국시대부터, 몽골, 후금, 청나라와 근대까지 전쟁에서 사망한 이름 없는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주는 무명사(無名祠)를 이곳에 건립하는 것도 평화도시 김포와 부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중봉산 밑에 우저서원과 마을이 있다. 현재 김포시 감정동이다. 김포관아는 1749년 8월 19일 영조대왕 방문했으며, 1797년 8월 15일 에는 정조대왕이 방문하여 용금루에서 시를 남긴 유서 깊은 곳이다.

 

지금까지 조선시대 대표적인 김포의 역사문화의 중심지역인 북변동의 김포관아를 살펴보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밀양, 공주, 과천, 나주(나주읍성 사대문 복원), 양주목 관아 등이 복원을 마쳤거나 현재 복원이 진행 중이다. 관아 복원 또는 부분복원은 과거와 현재 시민들이 생활하는 터전과 어우러지는 역사문화자원으로 연결되고 있는 추세다. 서울과 개성의 중간에 위치한 김포관아를 김포의 관광자원으로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김포신문  gimpo12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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