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군수 한필교의 숙천제아도에 있는 1867년 김포관아>

1867년 김포군수 한필교가 화공에게 그리게 하여 전해지는 김포관아의 모습은 드론을 하늘에 띄워 놓고 찍은 모습과 같다. 3D로 정밀하게 살펴보면 건물마다 명칭과 위치들을 지금과 견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그림을 보면 사우동, 북변동과 한강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중에서 김포향교는 지금도 그림에 있는 곳에 그대로 있으나 홍살문을 비롯해서 건축물은 1867년과는 다르다.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을 들어가면 그림에는 서재만 있고 동재는 없으나 현재는 서재와 동재가 있다. 강학장소인 명륜당을 지나서 내삼문을 들어서면 서무와 동무가 있다. 대성전은 지금과 같으나 현재는 홍살문은 없다. 관아와 향교의 경계에는 인가가 있다. 향교 위쪽으로는 사직단이 있다.

 

양천현이 있던 서울 가양동은 김포의 행정구역이었다. 서울에서는 양천현을 들려 고촌을 거쳐서 김포현을 들어오는 코스다. 지금의 48국도의 원형이다. 그림에 고촌의 천등산(天燈山)에서 김포관아로(북변동) 오고가는 길이 표시되어 있다(東距陽川大路). 김포관아로 들어가는 곳에 외삼문이 있고 내삼문으로 들어서면 동헌이다. 외삼문에는 담장이 없다. 동헌 좌측에 있는 객사인 금릉관(金陵館)을 들어가는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다. 동헌의 우측에 있는 향교와 좌측에 있는 금릉관 입구는 각각 홍살문이 있다.

 

동헌의 뒷산이 김포군의 주산인 북성산이다. 그림에는 북성산 명칭은 없으나 북성산 좌측에 장릉이 표시 되어 있고 중앙에는 냉정산과 봉수대가 보인다. 냉정산 우측으로 현재의 중봉산(中峰山)이 있으며, 아래에 마을(감정동 구두물)에 중봉 조헌의 생가에 인조 때 건립한 우저서원이 있다. 西北距通進大路(서북거통진대로)는 통진으로 가는 길이다. 지금의 국도와는 다르다. 옛길 복원에 참고가 되는 자료다.

 

동헌에서 앞쪽으로 멀리 야전(野田 들판)이 보이고 들판에는 집이 몇 채 있다. 그 앞으로 흐르는 강(江 한강)에 두 개의 섬과 초평이 표시되어 있다. 현재 일산대교 쪽에 있는 독도(獨島), 그 위로 초평(草坪 초평)이다. 초평은 풀이 많이 난 넓은 벌판이다. 그리고 박말도(朴抹島)다, 초평과 박말도 사이에 그려져 있는 작은 섬이 그림에는 이름이 없지만 이평(二坪)이다.

 

김포에는 고촌의 백마도와 사람이 살았던 조강의 유도, 덕포진 앞쪽의 부래도가 있다. 지금은 한강을 둑으로 막아서 한강의 일부와 갯벌은 홍도평이 되었고 다시 그 일부는 도시개발로 아파트가 들어서 현재의 모습과는 다르다. 한강을 넘어서 서울의 삼각산(三角山)이 보인다.

 

조선시대 영조와 정조대왕이 장릉에 행차하여 김포관아의 용금루에 올라 시를 남길 정도로 김포 풍경이 수려하고 아름다운 곳임을 알 수 있다. 용금루는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지나다 들려서 많은 작품을 남긴 곳이며 그 작품이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 당시 김포관아에는 용금루와 읍원루, 망화루 세 곳이 있었다. 읍원루(挹元樓)는 1829년 홍석주 일행이 통진으로 성묘를 다녀오던 중에 이곳에 들린 것을 기록하고 있다. 망화루는 1900년도에 이곳을 보수한 기록이 있다.

 

각 지역마다 지역학 연구가 한창이다. 최소한 문화자원의 터 하나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그곳이 어떤 곳인지를 알려주는 알림판을 세운다. 김포에서 20년 동안 도시개발로 눈앞에서 사라지는 문화자원이 아쉽다. 사람이 살아가는 개발을 거부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과거의 문화는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생명의 고리다. 지역의 역사문화자원을 보존하고 활성화하여 후손에게 남겨주는 것도 지금 김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이다. 내가 거주하는 아파트, 도로, 교통, 환경도 중요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역사문화자원에 관심을 갖는 것도 필요하다. 그것이 생활과 다른 것은 아니다. 시민이 관심을 갖아야 사라지지 않는다. 역사문화자원은 도시의 가치를 상승시키는 빛이다. 그 빛이 관광(觀光)이다.

정 현 채
문화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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