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칼럼·사설·기고
[기고] 일제에 의해 철거된 영조, 정조대왕의 현판(1)

   <김포군수 한필교의 숙천제아도에 있는 1867년 김포관아>

 

한필교(韓弼敎 1807-1878)는 조선시대 문인이다. 1867년에 김포(金浦)군수로 재직했다. 숙천제아도(宿踐諸衙圖)는 그가 부임했던 관아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긴 화첩이다. 숙천제아도는 현재 하버드대학교 옌칭도서관 희귀본 소장실에 보관 되어 있는 것을 김선주 하버드대 교수를 비롯한 국내외 학자 4명이 모여 한글과 영어로 옮기고 해제를 달아 2012년 국내에서 발간했다. 한필교의 숙천제아도에 남아 있는 1867년 김포관아의 모습을 보면서『금릉군지(1910년)』에 기록한 관아의 변천과정을 살펴본다.

 

영조대왕과 정조가 김포관아에 남긴 현판

금릉군지(1910년 이의락 역음)에서 기록하고 있는 아사(衙舍)의 연혁이다. 아사는 관청이다. 김포관아를 뜻한다. 현재 김포시의 행정구역에는 통진현과 김포현이 포함되어 있다. 금릉군지는 김포현의 기록이다.

 

“본군(김포현)의 관아는 장릉의 재실자리에 있었다. 조선개국 기원 후, 1626년(인조 4년)에 원종의 능을 관아의 터로 옮기면서 현을 지금의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그 후에 사창(곡물 저장창고), 황자고(창고)를 개조하고 1669년에는 행랑채 증설, 1727년에는 객사를 중수한다.<금릉군지 기록>

 

북변동으로 김포관아를 이전하기 전에는 장릉의 재실자리가 관아였다는 기록이다. 그 후 1745년 8월 19일 영조대왕이 장릉으로 거동하는 중에 김포관아를 방문하였으며, 영조의 말씀을 판에 적어서 관청 벽에 걸어 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 헌병이 이곳을 거처로 사용한 뒤로는 현판이 철거되었으며, 현판이 지금은 어느 곳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1776년에는 사직 담장을 고치고 군기고를 중수하며, 군옥(郡獄 감옥)을 개축한다. 1783년에는 사려단 및 창고를 고쳐지었다. 1791년(정조 15년)에 창고 14칸, 동헌 10칸, 책방 3칸, 담장, 판목담장 도합 70칸과 사직단 담장. 신실(神室)의 중문 7칸을 새로 건축한다. 신실은 조선 시대, 제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곳이다, 이러한 세세한 기록은 당시 관아의 기능과 역할을 알게 한다. 기록의 중요성이다.

 

1797년 8월 15일에 정조선황제(정조의 존호)가 김포 장릉으로 거동하는 중에 김포관아에 묵으면서 사운시(四韻詩)를 지었으며, 그 시를 용금루에 현판으로 걸어놓았다. 김포관아 용금루에 걸려 있던 정조의 어제(詩)는 지금도 전해오고 있으나 현판은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금릉군지에 있는(국역) 정조선황제의 시에는 당시 한강의 풍경을 엿보게 한다.

 

용금루(정조 어제)

푸른 연기 일만 아궁이에 용감한 군사들 묵는 곳

게 잡고 소금 굽는 마을들 아득히 끝이 없네

들녘 농부들의 노랫소리는 사방에 울려 퍼지고

중천의 달빛은 늦가을에 가장 밝구나

양화진 이어진 항구엔 조선이 줄을 잇고

금빛 달, 물 위에 솟더니 수루를 오르네

일 년 같이 기나긴 밤 떠날 길 더디기만 한데

강 고을 지나 돌아가는 기러기 소리 들린다.』

부총관 조윤형이 교지를 받들어 쓰다

 

정조대왕이 김포 장릉으로 행차하여 김포관아에서 하루를 묵으며 지은 시다. 관아에 있는 용금루에 올라 들녘의 농부와 포구마을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고 흡족해 하며, 강에는 물자를 실어 나르는 배(조선)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용금루는 지금의 북변동에 있었고 그곳의 주변에는 지금도 김포의 옛길이 있다.

 

1840년(경자년 헌종 6) 김포군수 홍길주가 객사 정문을 고치고 관청을 중수하였다. 홍길주는 김포군수로 발령 받기 이전인 1829년 서울에서 통진으로 형과 함께 성묘를 다녀가면서 김포관아에 있는 용금루에 들렸으며, 홍길주의 형인 홍석주1774~1842)는 용금루에 대한 시를 지었다. 홍석주는 1867년 김포군수로 재직한 한필교의 장인이다. 1867년 김포군수 한필교는 2곳의 사창(창고)과 화약고를 새로 세웠다. 이때에 김포관아를 그림으로 남겨“숙천제아도”에 전해오고 있다.

 

일제의 점령으로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김포관아

1898년에는 연청에다 공립소학교를 창설한다. 1906년에는 관청에 우편취급소를 설치하고 사령청에 순사주재소를 설치한다. 일제 침략이 김포관아를 점령하는 기록이 등장하고 있다. 1908년 동헌에는 일본 헌병이 거주하고 1910년 사창의 자리에 경찰서를 건축하였다. 1911년 객사와 연청을 사용하여 공립보통학교를 설치하고 1912년 사령청을 이용하여 공립심상소학교를 설치한다. 1913년에는 용금루에 응접실을 만들고 대청 및 동헌에는 서무계와 재무계를 설치하였다. 일제에 의해 김포관아의 모습이 점점 잃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금릉군지에서 기록하고 있는 내용을 부분적으로 정리했다. 현재 김포향교, 구 경찰서, 김포초등학교. 북성산(장릉산)과 중봉도서관(도당산)을 포함하는 북변동이 김포시의 역사, 문화자원의 근본자리임을 밝혀주는 자료다. 더불어 일제의 침략이 김포관아를 어떻게 점령하고 있는지 기록으로 말해주고 있다. 김포관아의 변천과정을 살펴보면서 아쉬운 것은 많으나 2019년 3. 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일제에 의해 철거된 영조와 정조가 김포관아에 남긴 현판이 지금 어느 곳에서 있는지 찾아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정현채
문화기획자

 

김포신문  gimpo1234@naver.com

<저작권자 © 김포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디지털 뉴스콘텐츠 이용규칙 보기

김포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포토뉴스
  • 1
  • 2
  • 3
  • 4
  • 5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