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운 발행인

요즘은 굶는 사람은 거의 없는 풍요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 풍요의 시대에 고시원에서 굶어 죽은 청년을 보고 어느 신부님은 3,000원짜리 청년들을 위한 밥집을 만들었다. 굶는다는 것은 전쟁 다음 인간 최악의 비극이다.
6.25전쟁 후 우리는 세계 최하위권의 굶기를 밥 먹듯하는 못 사는 나라였다. 잘 사는 사람보다 굶는 사람이 더 많은 시대에, 가난한 집안의 어린이가 청년으로 자라나며 어른이 되고 농사를 통해 부자가 되는 이야기는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들려주는 힘찬 메세지가 될 것이다.


최근 김포 아트홀에서 평생 농민으로 사신 분이 자신의 인생 기록을 쓴 책“나는 김포의 영원한 농민이다”의 저자 이만의 씨의 출판기념식을 가졌다.
삶의 역정을 보여주는 영상화면에서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한 농가에서의 고단한 삶을 대변해주듯, 어릴 적 사진 한·두장은 있을 법 한데 어릴 적 사진이나 초등학교 시절의 사진이 한 장도 없었다.
사진은 성인이 되면서 찍은 사진들이 약혼식, 결혼식 사진과 더불어 그 후의 사진으로 분류되어 화면을 채워갔다. 사진 한 장 찍기도 어려웠던 당시의 기억은 머릿속에만 있을 뿐 백일, 돌, 초등학교 입학, 졸업 때의 제3적 증명인 사진으로의 기억은 없는 것이다.

농민으로서 당시 가장 심취한 4H운동을 어린 날의 신념으로 삼아 잘 사는 농촌과 농민이 되기 위한 방법을 습득하고 실현하는 일에만 열중한 결과 벼 다수확상으로 대통령상까지 수상하는 사진에서 결혼하는 사진으로 이어지며 비로소 사진들의 기록이 나타난다. 
뒤이어 저자의 인사말 하는 시간이 되어 무대에 오른 이만의 씨는 울먹울먹 하며 마이크를 잡고도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과거의 행적을 담은 자신의 영상을 보면서 암담하고 처절하고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치열한 삶의 현장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을 것이다. 그 순간은 500여 하객들도 가슴 뭉클한 감동이 전이되는 듯 찡한 순간이었다.

얼마나 가슴에 뭉친 것이 많았을까! 그 시절의 사진 한 장 없는 가난한 살림살이와 어머니와 누나 둘, 여동생 한 명의 남자라곤 본인뿐이 없는 가정에서의 가족을 살려내고자 하는 어린 날의 주먹 꼭 쥐고 공부 잘해야 집안이 산다, 돈을 벌어야 가족이 흩어지지 않는다는 두 가지의 맹세로 살았다는 그 과거가 울먹이게 만든 것이리라.
1,600평의 논에 베어 놓은 벼를 묶어서 논두렁에 배리려면 장정 3명이 필요하다.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듣고 아침에 도시락 싸서 여동생과 함께 자신은 벼를 묶고 동생은 볏단을 배려놓기를 끝내 놓으니 다음날 아침이 되었고, 남매는 그렇게 밤을 새웠고 비가 오기 시작했다고 회고한다.
이웃의 도움으로 교복을 입었고, 누님들의 이웃집 밭일로 번 돈으로 간신히 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고등학교를 포기하고 대신 여동생을 공부시켜 고등학교를 졸업시킨 뒤 정작 자신은 검정고시로 고교과정을 마쳤다는데, 당시만 해도 아들을 공부시키고 딸을 희생시켰던 시대에 자신이 돈을 벌어 여동생을 공부시키겠다는 결단이 중학생의 어린 나이에는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다. 정말 대견한 일이다.

자신이 가장이라는 확고한 신념이 만들어낸 결과일 것이다. 중학교 시절 수없이 돈 가져오지 못하면 학교 나오지 말라는 선생님의 말로 상심한 수치심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고 한다. 결혼 후에도 그의 부인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20여 년을 구멍가게를 운영했다. 
일제 강점기와 6.25의 전쟁 후유증으로 가난이 만연한 시절에는 장리 쌀 갚고 나면 소위 말하는 보릿고개가 찾아온다. 보리가 익기 전쯤이면 식량이 떨어진다. 우선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겨울을 지나 퍼렇게 한 발 자라난 보리를 베어서 죽을 쑤기도 하고 장떡을 부쳐먹기도 했다.
마당가에 심은 호박잎과 근대를 삶아 먹고 수제비를 먹는 것만도 다행인 시절이었다. 붕어 잡고 미꾸라지 잡고 굶주림을 해소할 수만 있다면 도둑질 빼고는 다하던 안타까운 시절이었다. 여섯 살에 아버지 없는 집의 가난은 미루어 짐작이 간다.

농민 이만의가 성공한 농민으로 자리 잡는데 가장 큰 역할은 논어와 맹자였다고 한다.
논어와 맹자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덕목을 깨우치는 것이 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대신,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는 학식을 키우고 자신을 정립하기 위한 방편으로 한학을 자습했던 것이 세상사는 정도(正道)와 인륜(人倫)의 마땅한 삶의 자세를 견지하게 된 동기였다고 한다.
君子(군자)는 憂道(우도)요, 不當憂貧(부당우빈)이니라를 좌우명으로 삼았다.(군자는 도를 근심할 것이지, 가난을 근심해서는 안 된다) 그가 남달리 불의에 저항하고 인륜에 어긋나는 것을 보면 참지 못하는 정신은 선조들의 선비정신을 어릴 때부터 자신의 중심 정신으로 정착시킨 결과일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정도가 아닌 비정상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항상 매처럼 빛난다. 그를 잘 아는 지인들은 뒤늦게 자신이 번 돈으로 석사학위까지 취득하고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것은 마지막 삶을 노인복지를 위해 정진하겠다는 의지라고 말한다.   
늦은 나이에도 히말라야를 등반하고 지금도 쌀 한 가마를 멜 수 있는 건강과 정열이, 이 책을 읽은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귀감이 이어지고 김포의 농민으로 오로지 농사만을 전념하였고 이제 보통 사람들이 꿈의 목표라는 100억 원 이상의 재산도 모았으니 성공한 인생이라 할 만하다.

최근 400억 원 전 재산을 고려대학교에 기부한 노부부의 이야기가 화제다. 그분 또한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하고 산동네 꼭대기 사글셋방에서 신혼을 시작했다고 한다. 가난으로 시작한 인생은 숱한 사연과 인생 스토리가 즐비하다. 요즘의 나약한 젊은이들에게는 살아있는 전설이다. 젊은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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