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룡 
세무사, 경영학박사, 수필가,
전) 명지전문대학교 교수
김포신문 논설위원

지난해 햇볕이 쏟아지는 봄날! 어디선가 봄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세상이 어수선한 상념을 떨쳐 버리기 위해 모처럼 친지와 함께 남양주시에 있는 조선시대의 실학자요 정치가였던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 여유당與猶堂을 찾았다.

나는 고즈넉한 뜰 앞에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이 책을 들고 앉아 있는 동상 앞에 섰다. 조선시대 대학자의 채취를 느끼며, 정중하게 참배했다. 그곳에는 다산문화관과 기념관, 동상, 사당인 문도사, 다산의 묘, 여유당, 그리고 오른편 끝자락에는 실학박물관이 있다. 그리고 다산의 집뒤 능선을 따라가면 해발630미터 산위에서 학문의 도를 밝혔다는 철문봉喆文峰이라는 명산이 있다.

다산은 정치와 경제, 문학과 철학 뿐 아니라 건축학, 의학, 군사학, 자연과학 등 거의 학문분야를 연구해서 ‘목민심서’牧民心書‘(1818),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등 600여권의 방대한 저술을 개인적으로 집필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위당 정인보는 다산 선생을 정법가라고 호칭했다. 또한 배다리와 거중기를 발명한 조선시대의 ‘레오라르도 다빈치’로 알려 저 있다. 다산은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 4대인물로, 장자크 루소, 정약용, 헤르만 헷세, 드비시 중 한 분이다.

다산이 일곱 살에, 아버지로부터 경서經書를 배울 때 였다. 마을 앞에 펼쳐진 산과 들을 바라보며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고’(小山蔽大山), ‘먼 곳과 가까운 곳 차이입니다’(遠近地不同).라고 읊은 일화는 다산이 얼마나 영리한 소년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고증 성호의 유고를 읽으며 실학에 눈뜨고, 이 벽에게서 서학을 배워 경세안민經世安民의 뜻을 굳혀갔다. 그분은 정조대왕의 사랑을 받아 10년 동안 (27세에서 37세까지) 가주서假注書의 낮은 벼슬에서 시작해서 檢閱, 修僎, 同副承旨, 兵曹參議, 刑曹參議, 등 정삼품의 고위 내직과 金井察訪, 谷山府使, 등 외직을 지냈으나 끝내는 서학天主敎과 연루됨으로써 벼슬을 접고 연찬硏鑽과 저술로 미래를 설계하기에 이르렀다.(심재기, 정약용의 寄淵兒書.참조) 다산은 천주교신앙을 가졌고, 서학西學에서 자유로 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천주교에서 영세를 받은 이숭훈은 다선의 매부요,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의 주인공 황사영은 조카사위이다. 주교요지, 성교전서 등 교리책을 지은 사람이 셋째 형 정약종이다. 이분들은 황사영백서 사건(주1)에서 비롯한 신유박해辛酉迫害(1801년) 때에 300여명이 순교했고, 다산은 겨우 목숨을 유지했으나, 18년 동안 강진에 유배된 것도 황사영백서 사건에 연루된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산은 강진의 유배생활 18년을 마치고 1818년 57세에 돌아와 1836년 75세 나이에 세상을 뜰 때 까지 여유당에서 18년, 즉 36년의 말년이 없었다면 조선 근세의 대학자 정약용은 존재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역사는 천재적인 사상가에 의해 어느 순간에 새로운 역사가 창조되기도 한다. 1712년 프랑스의 ‘장자크 루소’가 태어나고, 그가 50세이던 1762년에 “사회계약론”을 출판했고, 그해 조선에서는 다산 정약용이 태어났고, 57세인 1818년에는 “목민심서”를 저술하였다. 독일에서는 그해 ‘칼 마르크스’가 태어났다. 1789년은 다산이 28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공직생활을 시작했는데, “사회계약론”의 영향으로 프랑스는 혁명이 일어나 세계사에 큰 변혁이 일어났다. 공교롭게도 1867년은 마르크스가 50세의 나이로 “자본론” 첫 권을 간행함으로써 세계역사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이처럼 ‘사회계약론’과 ‘자본론’은 세계를 뒤흔든 저서였다. 다만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저술한 책이라는 이유로 “목민심서”는 전혀 세계사를 움직이는 책이 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베트남 지도자 ‘호치민’(1890-1969) 은 “목민심서”를 공무원의 지침서로 채택했고, 그의 머리맡에는 생전에 애독했던 “목민심서”가 있었다고 하니 공직자의 바이블 같은 존귀한 존재가 아닌가 싶다.

다산은 세종대왕 다음으로 성군인 정조대왕의 총애를 받아 두 사람은 400여 년전 조선의 지배논리인 성리학의 벽을 허물고 새로운 조선을 만들고자 의기투합 했다. 정조는 과감히 서자인 박제가를 규장각奎章閣의 검서관으로 등용하고, 그 정점에 정약용 선생이 있었다. 목민심서는 한마디로 지방관리들의 책임과 의무는 무겁고 냉정해야 한다는 공무원을 위한 지침서이다. 흠흠신서는 법의 집행에서 억울한 백성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다산의 애민사상과 민본사상이야 말로 학문이 실천으로 연결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그 가치가 높다할 것이다. 그러니까 신분제도 보다는 능력위주의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애썼고, 부정부패의 척결에 힘써야한다고 강조했다. 소동파蘇東坡(1036-1101)는 필화사건으로 죄를 지어 황주의 양지강에 유배돼 있을 때, 황주성 밖의 적벽에서 선유하면서 “적벽부赤壁賦”라는 대작을 지었고, 또한 “신곡神曲”이라는 대작을 남긴 ‘단테’나 다산의 “목민심서牧民心書”라는 대작도 쓰라린 유배생활이 그 계기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18세기 한갖 지역어에 불과했던 독일어가 세계적인 언어로 된 데에는 ‘괴테’라는 건출한 문인 덕분 있었다. 그는 문학을 통해 독일을 세계 속에 우뚝 성장시키지 않았는가. 또한 영국은 ‘세익스피어’와 ‘워즈워스’라는 극작가와 시인이 나오기 전에는 국지적인 문학과 문화에 불과 했다. 이제 ‘인도와도 안 바꾸겠다’는 ‘세익스피어’가 없는 세계 연극사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산의 강진유배지에서 18년간의 고통스럽던 삶을 떠올린다. 시인 정호승은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길을 “뿌리의 길”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므로 나라의 뿌리는 백성이고, 정치의 뿌리 또한 백성일 진데 공직자는 ‘백성이 주인’ 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뿌리의 길>

다산 초당으로 올라가는 산길/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

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 다는 것을

지상의 바람과 햇볕이 간혹/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뿌리의 눈물을 훔쳐 준다는 것을/ 나뭇잎이 떨어져 뿌리로 가서

다시 잎으로 되돌아오는 동안/ 다산이 초당에 홀로 앉아

모든 길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어린 아들과 다산 초당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며

나도 눈물을 닦고/ 지상의 뿌리가 되어 눕는다/

산을 움켜쥐고/ 지상의 뿌리가 가야할/ 길이 되어 눕는다.

- 시인 정호승 -

 

주1) 황사영백서는 북경 프랑스 구베아주교에게 조선의 천주교 박해 내용을 알리는 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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