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동네 산 중턱에 암자가 있는데 나이 먹은 스님 한 분이 수행하고 계셨습니다.
텃밭도 있어 거기에 얻은 수확물로 생활을 해결했음으로 탁발하지 않았습니다. 평시에는 공부와 수행에 몰두하지만, 성격이 상냥해서 마을에 경조사가 있을 때면 기꺼이 찾아와 불경을 읽어주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이 스님을 존경했습니다. 어느 날 조용한 이 마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슥한 밤에 숲 속에서 두 남녀가 은밀히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동네 총각 명덕이와 영순이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집안끼리 사이가 좋지 않아 혼인을 반대함으로 이렇게 몰래 만나서 사랑을 키워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영순아, 아무래도 혼인은 미뤄야겠다. 내일 아침 관아로 출두하래.”
북쪽 국경에 오랑캐가 출몰하는 바람에 전국의 젊은이들이 징집되어 변방으로 나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때가 때인 만큼 전쟁이 벌어지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영순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그럼 어떡해? 내 뱃속에 아기가 자라고 있단 말이야.”
영순의 말에 명덕의 얼굴이 일그러졌습니다. 양가의 눈치를 보면서 분위기가 좋아지면 혼인하려고 마음먹었는데 덜컥 영순이가 임신했다고 하니 큰일 난 것입니다. 
“할 수 없지. 가까운 친척에게 말해 놓을 테니 배가 부르면 그 집에 가서 아기를 낳도록 해.”
이렇게 해 놓고는 두 사람은 헤어졌습니다.
다음 날. 젊은이들은 떼 지어 관아로 향했습니다. 가족들의 슬픈 환송 사이에 영순이도 남몰래 눈물을 훔쳐야 했습니다.

명덕이가 변방으로 떠난 몇 달 후에 배가 불러온 영순은 집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부모님에게 임신 사실을 들키고 말았습니다. 아비가 누구냐고 추궁하자 영순이는 총각의 이름을 대지 못하고 암자의 스님이라고 해버렸습니다.
가족들은 모두 놀랐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영순이는 그날부터 밖에 나가지 못하고 출산할 때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을 낳았습니다.
부모님은 아기를 안고 암자로 갔습니다. 마침 스님은 마루에 책상을 펴고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영순의 아버지가 아기를 내려놓고 말했습니다.

“스님께서 제 딸을 귀여워하시어 아들을 낳았으니 거둬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스님은 책장을 덮으며 나직하게 대답했습니다.
“아, 그래요?”
영순의 부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날부터 동네에 소문이 났는데 스님이 어떤 여자와 사통해서 낳은 아기를 키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스님을 욕하는 사람이 생겼고 암자를 찾아가지도 않고 마을의 경조사에 초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년이 흘렀습니다. 전장에 나갔던 명덕이는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스님과 사통해 아들을 낳았다고 구박당하던 영순을 몰래 만나 자초지종을 들었습니다. 명덕은 자신의 부모님과 영순의 부모님을 만나 그 아이의 아비는 자신임을 밝히고 혼인하겠다고 했습니다. 놀란 것은 영순의 부모님이었습니다. 딸, 사윗감과 함께 한달음에 암자를 찾아갔습니다.
스님은 텃밭에서 호미질하고 있었고 세 살이 된 아이는 마루에서 뛰어놀고 있었습니다. 네 사람은 무릎을 꿇고 진실을 고백하고 사죄했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호미를 놓고 나직하게 말했습니다.

“아, 그래요?”
하고는 마루로 가서 아이를 번쩍 들어 건네주었습니다. 이 사실은 금세 동네에 퍼졌습니다. 파계승의 누명을 쓰고 아이를 키운 고매한 성품에 모두 감동했습니다.
며칠 뒤에 명덕이와 영순이는 혼인을 거행했고 스님도 초청되어 축하해 주었습니다.
수행자에게 덮어씌운 억울한 누명이 뒤늦게 밝혀져 고매한 스님이라고 추켜세우는 것에도 무심한 듯했습니다.
 

최영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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